『녹색당의 실험과 가능성의 기록: 2010년대 새로운 정당 운동의 유산화』를 연재합니다. 본 연재는 2024년 10월 제주에서 ‘다른 정치의 본령'(이하 다정본) 주최로 열린 워크숍의 논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며, ‘대안정치공간 모색’이 공동 편집하였습니다. 다정본은 녹색당, 정의당 등 정당 활동 경험이 있는 연구자와 활동가가 모여 정당과 정치조직화에 관해 탐구하는 모임입니다.
※ 글에 관한 의견 및 토론은 댓글 또는 teammosaek@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토론문 게재를 요청하시는 경우 검토 및 편집을 거쳐 게재할 수 있습니다.
4부. 후속 토론
주제1. 페미니스트 정당과 녹색당 / 주제2. 정당의 목적과 목표, 기능
제주에서의 워크숍 이후 참가자들은 각자 작성한 글의 초안을 공유하였고, 글 속에서 풀리지 않는 고민이나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함께 논의해보고 싶은 주제를 선택해 한차례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습니다. 아래 글은 이를 바탕으로 온라인에서 진행된 논의의 기록이며, 대화의 형식을 유지하되, 내용을 요약하고 재구성한 것입니다.
토론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2명의 참가자가 사전에 질문을 공유하기로 했으며, 논의는 제안된 두 가지 주제인 <페미니스트 정당과 녹색당> 및 <정당의 목적과 목표, 기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주제 별로 약 1시간 정도 진행된 두 가지 주제의 논의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두 가지 주제에 대한 각각의 기록을 읽으실 때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제1. 페미니스트 정당과 녹색당
<사전에 공유된 질문(질문자: 상애)>
아래 ①, ②, ③이 논의를 위한 기반으로 동의가 되시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어요.
① 녹색당을 통해 ‘페미니스트 후보‘들이 출마했고, 녹색당에서는 제도적으로 여성의 대표성과 정치참여가 적극적으로 보장되고 있으며, 녹색당은 ’페미니스트 정당‘을 표방한다.
②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앞세웠던 공직선거 후보들이 정당을 떠났다. (외부적으로 페미니즘으로 녹색당을 대표했던 인물들이 녹색당을 떠남)
③ 여성의 대표성과 정치참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제도는 잘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녹색당의 페미니즘적 이상과 현실이 불일치하는 상황)
동의가 되신다면, ‘페미니스트이기에 녹색당원이다’라는 말의 유효성을 점검해보고 싶어요. 일단 저는 녹색당의 ‘페미니스트 정체성’에 이끌려(그게 전부는 아니고 지역당 정체성도 있지만…) 당원이 됐고, 어떤 시점에서는 페미니스트이기에 녹색당원이라는 말이 의심의 여지 없이 유효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위의 ①, ②, ③을 놓고 보면, 녹색당의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다시 생각해보게 돼요.
그리고 녹색당을 ‘페미니스트 정당’이라고 한다면, 선거와 조직화 전략으로 ‘페미니즘’을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안티페미니즘 백래시 시대에 ‘페미니즘이 선거에 의미 있는 자원이 되나?’라는 질문은 우선 제쳐두고…] 외에 다른 의미부여가 가능할지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선거와 조직화 전략으로 페미니즘을 자원으로 활용하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녹색당의 페미니스트 모먼트에 맞물려 당원이 됐음.)
왜 다른 의미를 더 부여하고 싶을까. ‘선거 승리를 위해 조직된 정치 결사체’라는 것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 같은데요.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이 강한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녹색당에 남아있는 이유를 고민해보게 됩니다. 녹색당의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고민하다보니, 다시 녹색당의 정당적 성격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 같긴 하네요.
상애
워크숍 이후에 녹색당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니, 제가 녹색당의 완전한 내부자라는 느낌은 받지 못하겠더라고요. 물론 이곳에 계신 선생님들 각자의 특수성이 있을 겁니다. 중앙당에서 실무를 하셨던 분도 있고, 다양한 위치성을 가진 분들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됐어요. “나는 왜 녹색당에 가입했지? 어떻게 녹색당에 조직되었지?” 이런 질문들을 던지다 보니 처음에는 단순히 “나는 페미니스트라서 녹색당원이 됐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번 워크숍 과정과 글쓰기 과정을 거치면서, 그 말이 과연 지금도 유효한가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정말 의심할 여지 없이 유효했던 말이었죠. 그런데 제가 글을 정리하면서 적어놓은 ①, ②, ③번 논의의 기반을 살펴보니, 지금은 그 말에 그렇게 확신을 가지지 못하겠더라고요.
이 고민은 페미니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준희 님의 글에서도 나타났듯이, 다른 가치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고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을 작성하다가 중간에 한 번 지웠던 표현이 있어요. 그게 뭐였냐면 “녹색당은 공동체인가 정당인가?” 라는 질문이었어요. 그런데 공동체라고 주장하기에는 뭔가 머쓱해서 지웠습니다. 녹색당을 페미니스트 정당이라고 한다면, 지금 녹색당을 대표할 만한 페미니스트 인물도 많이 남아 있지 않고, 당 내부에서 페미니즘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 페미니스트 정당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어요. 그렇다면 페미니즘을 단순히 선거와 조직화 전략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그런데도 저는 그 이상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혼자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고민한 질문이에요. 그래서 저도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대답이나 확실한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이런 고민들을 제가 갖고 있다는 걸 공유드리고 싶었고, 선생님들은 이 고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페미니스트 정당은 어떤 정당인가?
범일
방금 말씀을 들으면서 저도 궁금해진 점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페미니스트 정당이라고 하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가 사실 저한테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아요. 저도 녹색당을 페미니즘 정당이나 페미니스트 정당이라고 딱 잘라 얘기하기보다는, 한국 사회에서 정당법상 등록된 정당들 중에서 여성 정치인들이 상대적으로나마, 정말 그나마 그나마 정치적인 공간을 조금 더 넓게 가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걸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스트 정당이나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정당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정도로 무슨 페미니즘이야? 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상애 님이 생각하시는 페미니스트 정당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떠올리며 말씀하신 건지, 그 상을 조금 말씀해 주시면 이야기가 더 풍부하게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애
글쎄요. 녹색당의 정체성에는 분명히 페미니즘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내부 운영 원리도 성평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라고 생각해요.
또, 이런 페미니즘적인 원칙이나 문제들이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고, 당 내부에서 진지하게 논의거리로 다뤄진다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민주당에서도 여성 정치인을 많이 배출했고, 그 안에 페미니스트 정치인 개인들도 존재하잖아요. 하지만, 민주당에서 미투 사건이 터졌을 때 당 차원에서 그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뤘는가를 생각해 보면, 사실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런 맥락에서 녹색당은 다른 정당들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고 느껴져요.
형수
저도 녹색당이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정당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녹색당에서 페미니즘이 대표 의제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녹색당은 시기에 따라 다양한 의제를 전략적으로 대표 의제로 삼아왔던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2018년에서 2020년 사이에는, 의도된 결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페미니즘을 주요 의제로 내세웠던 것 같습니다. 창당 초기부터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당에 결합해 여성 과반제를 실현하고 성평등한 조직 운영을 위해 노력했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물론, 이런 노력들이 얼마나 잘 안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정당에 비해서는 훨씬 열심히 시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만, 과연 녹색당에서 페미니즘이 대표 의제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라는 점에서는 회의적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를 정치적으로 표방하고 지속적으로 이끌어가는 정치인들이 부족하다는 점이고, 당내에서도 페미니즘 정당에 대한 문제제기를 누군가 꾸준히 해왔던 것도 사실이고요. 저는 적어주신 질문을 보면서 이런 점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태영
이 이야기는 정당이라는 특성과도 연결되는 고민이라고 생각해요. 범일 님이 던진 질문(편집자 주: 논의의 두번째 주제인 <정당의 목적과 목표, 기능>)과도 맥락이 닿아있고, 저도 이 대목에서 조금 더 고민이 깊어진 것 같습니다.
페미니스트 정당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은 마치 녹색당은 어떤 정당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수준의 화두를 던지는 것 같아요. 페미니스트 정당은 어떤 메커니즘을 가져야 하고, 어떤 운영 원리와 정치 방식을 갖춰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 정당이 특정 가치를 표방하는 쉬운 접근 중 하나는 그 가치를 정당이 주장하는 정책으로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 공약을 만들고 이를 당의 정책 한 챕터에 넣는 것이죠. 녹색당도 이건 해왔다고 봐요. 페미니즘 공약을 꾸준히 만들어왔고, 그에 더해 당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려고 노력해왔죠. 하지만 그 다음 단계는 뭘까요. 여기서부터는 다양한 난제들에 부딪히게 됩니다. 단순히 공약을 만들고 조직적인 틀을 마련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고, 재생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기는 거죠.
이런 점에서 저는 “녹색당이 탈핵 정당인가?”라는 질문과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껴요. 녹색당은 탈핵 공약을 만들었고, 탈핵특위 같은 기구도 운영했죠. 하지만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여기서도 비슷한 질문에 봉착합니다. 그리고 정당이라는 조직이 과연 그다음 단계까지도 실현 가능한 조직일까, 정당이라는 공간 자체가 본질적으로 이 한계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질문은 결국 “정당이 공동체인가, 아니면 정치 조직인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정당이 단순히 정책을 발표하고, 일시적으로 기구를 운영하는 데에서 멈추는 조직이라면, 그 이상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실현하고 재생산하는 데는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는 건 아닐까요? 지금의 제 느낌으로는, 정당이라는 형태 자체가 이런 한계와 맞닿아 있고, 그게 범일 님이 언급했던 ‘흐린 눈’(편집자 주: 논의의 두번째 주제인 <정당의 목적과 목표, 기능>을 제안하는 글에서 정당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흐린 눈’이 필요하지 않냐는 문장이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두번째 주제에 대한 논의 기록을 읽어주면 좋겠다.)이라는 키워드와도 어딘가 연결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수
이 이야기를 조금 일반화해서 생각해 보면, 정당은 정치적 의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정당 자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원리로 작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즉, 정당이 대표 의제로서 페미니즘을 표방할 수도 있고, 또는 조직 운영의 원리로 페미니즘을 채택해서 운영할 수도 있는 거죠. 녹색당도 이런 맥락에서 당내 민주주의나 직접 민주주의를 접목하려는 시도를 해왔던 것 같아요. 다만,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항상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곤 했죠.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다 보니, 문득 이런 고민도 들었습니다. 과거에 누군가 녹색당에게 “당내 민주주의에 집착하지 말고, 한국 정치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 발언을 떠올리면서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그리고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조직이 덜 성평등하더라도 사회적 성평등이라는 목표를 우선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과연 이런 태도가 수용 가능한 것인지, 이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결국, 정당이라는 것이 어떤 정치적 목표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그 정당이 표방하는 이념과 가치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조직 운영 원리로 체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감각이 당원들에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조직 운영 원리 자체에서 이 가치를 실현하는 데 더욱 천착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고민은 결국, 정당이 단순히 사회적 변화를 목표로 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표방하는 가치를 구현하는 실험적 공간이어야 한다는 기대와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녹색당은 페미니스트 정당?
우식
저도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상애 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주요 문제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녹색당의 페미니스트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녹색당의 정당적 성격에 대한 문제입니다.
먼저, 정당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저는 정당을 하나의 통일된 정치 조직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봐요. 정당의 입장이라는 것도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일반론적으로 보면 페미니즘 정당이 되는 것과 선거와 조직화 전략으로 페미니즘을 활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사실 그렇게 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는 오히려 겹치는 부분이 많고, 페미니즘 정당이란 결국 이런 방식을 통해 실현되는 거라고도 볼 수 있죠.
다만, 이 차이가 문제가 되려면, 페미니즘이라는 단일 의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당이어야 하겠죠. 하지만 녹색당이 처음부터 그런 단일 의제 정당으로 출발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정당에 비해 녹색당이 페미니즘이라는 가치를 상대적으로 선명하게 추구해왔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아요.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는 녹색당의 페미니스트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입니다. 녹색당은 다양한 정체성을 표방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우선적으로 내세우는 주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때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렇지 않은 입장 사이의 논쟁이 있을 수 있겠죠. 저는 여기서 중요한 점이,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내세우지 않는 진보정당이 과연 지금의 시대에서 어떤 존재 근거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문제라고 봅니다. 단기적으로 선거에서 이익을 얻는 것과는 별개로, 시대적 흐름에서 진보정당이 페미니즘을 선택의 문제로 삼는다면 그 정당의 존재 이유가 약해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다른 의제들처럼 페미니즘도 선택의 문제가 될 수는 있겠지만, 지금 시대에 페미니즘은 단순히 선택의 문제로 여겨질 수 없는 핵심적인 가치가 아닐까요? 결국, 페미니즘을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이 앞으로의 정치 조직에서 중요한 지향점이라면, 왜 그래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맞는지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단순히 누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그런 부분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준희
저도 질문을 보고, 지금 2024년 기준으로 녹색당이 페미니스트 정당이라는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예를 들어, 2018년에는 적어주신 것처럼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후보들이 있었고,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이 이어졌죠. 현재 녹색당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여전히 다양한 연대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고, 여성위원회가 존재하며, 탈핵특위처럼 특정 의제를 다루는 기구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 여성 과반제를 포함한 성평등 관련 제도와, 다른 정당들보다 이른 시기부터 만들어진 구체적인 페미니즘 공약들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만약 여성 대신 동물권 같은 다른 키워드를 넣어도 비슷한 체계와 활동이 존재한다고 느껴집니다. 이게 문제라는 건 아닙니다만, 제가 정책 활동가로 일하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약간 연방제 같은 느낌이 있다는 거예요. 각자가 자기 의제를 맡아서, 서로 터치하지 않는 구조라는 느낌이요. 이게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싸우기 싫어서 그렇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여러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 정당이라는 것은 단순히 제도나 공약의 존재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중요한 기본 토대이지만, 페미니스트 정당이라고 불리려면 당 전체에서 공유되는 보편적 관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 당에 그런 보편적 페미니즘 관점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9천 명의 당원 모두가 페미니즘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인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당 운영과 의사결정의 기본 틀에서 페미니즘이 보편적 관점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다만, 저는 단순히 페미니즘 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보다는, 조금 다른 결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연대 활동이나 공약 만들기에서는 당연히 페미니즘 관점을 지닌 당원들이 주도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상황들에서도, 예를 들어, 운영위원회에서 당무를 논의하거나, 교통 공약을 짜는 회의 등에서도 우리가 페미니즘 관점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한 번 더 고려하는 문화가 당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원 간의 이해 수준 차이가 크기 때문에 그런 검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런 문화적 장치는 있는 정당이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의 후반부에 나오는 페미니즘이 선거와 조직화 외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봤는데요. 저는 정당의 궁극적 목표가 조직화라고 보기 때문에, 그 이상을 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조직화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자임하는 당원이나 정치인이 늘어나게 만드는 과정이고, 저는 이것만으로도 정당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공동체적인 역할이나 다양한 이상적인 모델도 있겠지만, 정당의 역할은 조직화를 통해 가치를 담지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인적·정치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녹색당이 이러한 역할은 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주
사실 저도 녹색당을 페미니스트 정당이라고 명확히 생각했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엄밀히 말하면, 녹색당의 기조나 분위기에서 페미니즘이 대세처럼 느껴졌던 시기가 있었을 뿐인 것 같기도 하고요. 정당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핵심 의제나 기조가 바뀌기 마련인 조직이라고 생각하는 쪽에 가까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변화가 단순히 홍보나 전략적 이유로 특정 의제를 선택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준희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정당이라는 것은 결국 어떤 조직을 만들고 싶은가라는 질문과 연결되고, 그에 따라 추구하는 문화와 가치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식 님이 말씀하셨던 진보 정당, 혹은 앞으로의 정당들이 페미니즘을 선택의 문제로 보느냐 아니냐라는 질문도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페미니즘을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정당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에는 민주당도 전략적으로 페미니스트 정치인을 내세운 적이 있죠. 하지만 백래시가 강해지자, 개혁신당처럼 혐오적인 기조를 공개적으로 취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정당이라는 것이 어떤 의제를 선택하는 문제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건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동물권이나 다른 여러 이슈들에도 마찬가지 같아요. 사실 이런 유동성 자체가 정당적인 성격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선택이 단순히 선거를 위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기도 어렵죠. 어떤 의제를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것과 그것을 기반으로 조직의 문화를 형성하고 가치를 추구하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차이를 잘 이해하고 논의하는 것이 앞으로의 정당이나 정치 조직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 같아요.
진보정당 운동과 페미니즘
태영
우식 님 말씀이 저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그게 저에게도 동의가 되면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 같아요. 앞으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다른 대안 정당이나 진보 정당 운동들에서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질지, 아니면 선택의 문제로 여겨질지가 정말 중요한 준거점이 될 거라는 이야기였잖아요. 이건 굉장히 직관적인 통찰이지만, 동시에 앞으로의 정치 방향성을 고민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고 실험이지만 만약 사회주의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회주의도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처럼 여겨질 때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자 방향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저는 우식 님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예를 들어, 사회주의라는 지향, 혹은 반자본주의라는 입장이 어떤 입장에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핵심 가치였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이를 선택 사항으로 다루려는 입장과 경합하기도 하고요. 결국 그러한 맥락에서 반자본주의는 단순히 하나의 정치적 의제가 아니라, 정당의 근본적인 방향성을 정의하는 문제였던 것 같아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특정 가치나 이념을 선택의 문제로 삼느냐, 필수적인 문제로 삼느냐에 대한 판단이 정당 내에서 중요한 전선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고민은 단순히 반자본주의나 페미니즘 같은 특정 가치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정당이 지향하는 근본적 기조와 전략적인 유연성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가라는 다른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식
은주 님 말대로, 사실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선택의 문제인 것 같아요. 반자본주의나 사회주의도 결국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직관적으로 그렇게 느껴요. 왜냐하면, 이 선택을 통해 얻게 되는 정치적 실익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죠. 반자본주의나 사회주의는 진보 정치 내에서 오랫동안 특정 지지층을 끌어모으는 상징적인 깃발 역할을 해왔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익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페미니즘 의제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은주 님 말씀처럼, 지금은 페미니즘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진보 정당들에게 단기적으로 불리할 수도 있는, 애매한 국면인 것 같아요. 특히 선거를 생각해 보면, 페미니즘 의제를 전략적으로 내세우지 않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죠. 그런데 저는 여기서 “왜 그런 상황이 되었을까?”를 고민해보자는 거예요.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 단순히 평평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선택은 지금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강제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강제된 국면에서 페미니즘을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는 것 자체가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모든 것이 전략적 선택의 문제로만 여겨진다면, 페미니즘 같은 의제는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단기적으로 선거에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당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해보면, 정당이 단순히 선거에서 이기고 권력을 획득하는 조직으로만 정의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전략적으로 페미니즘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뭔가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제가 느끼는 이 모호한 거부감은 단지 선거 전략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결국, 어떤 의제를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문제라고 봅니다. 반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하게 주장하잖아요. 이런 맥락에서, 정당이 어떤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인지, 언제나 어디에 설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단순히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의 본질적인 방향성을 결정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선택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 것인지가 앞으로의 진보 정당, 혹은 대안 정당이 풀어나가야 할 중요한 정치적 질문이라고 느껴져요.
선거 승리, 당내 민주주의, 그리고 녹색당의 성평등 운영 원리
태영
저는 그리고 아까 형수님이 언급하신 코멘트가, 지금도 계속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중요한 긴장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현 님의 글에서 이 포인트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문단을 발견했어요. 바로 선거 승리와 당내 민주주의라는 구도가 한 문단에서 경합하는 형태로 등장하는 부분이었죠.
그 구도를 보면서, 당장은 이런 평가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자주 인용되는 어떤 주장처럼 “정당의 본질적인 목표는 선거 승리인데,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당내 민주주의만 천착한다면, 그 민주주의를 추구한 행위의 정당성마저 약화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 논리 속에서는 선거 승리와 당내 민주주의가 대립적인 관계, 마치 제로섬적인 구도로 설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저는 “과연 이 두 가지가 정말로 태생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가?”하는 질문이 있거든요. 우리가 이 구도를 단순히 상충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구조적인 긴장은 형수님이 말씀하신 위험성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 긴장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두 가지를 대립적 구도로 보지 않고, 선순환적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틀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식
택일의 문제는 아니더라도, 당내 민주주의의 실현과 당내 통합 혹은 선거 승리라는 목표 사이에는 상충되는 부분이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무리겠죠. 저도 태영 님처럼, 한 가지 방향으로만 가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현 님의 글을 보면, 이 문제가 녹색당 내부에서 상당히 중요한 쟁점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당내 민주주의 쪽으로 너무 지나치게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엿보입니다. 제가 읽은 바로는, 이런 치우침이 당내 통합과 선거 승리라는 목표와의 균형을 깨뜨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또 태영 님의 글에서는 약간 다른 시각이 보이기도 합니다. 녹색당의 신념과 의사결정 경향을 일관되게 살펴보면, 결국 선거 승리를 위한 방향으로 결정을 해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두 주장은 서로 대립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이 논의를 페미니즘 문제에 대입해 본다면, 녹색당은 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으로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채택했을까요? 아니면 당내 민주주의와 문화를 지키는 쪽에 더 무게를 두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의 사실 판단과 입장에 따라 다르게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녹색당은 두 가지를 모두 시도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전략적으로 유리한 시기에는 페미니즘을 밀고 나가며 선거에서 이를 활용했지만, 동시에 당내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다고도 해석할 수 있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녹색당이 항상 특정한 한쪽을 선택해왔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는 녹색당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균형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형수
결국,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지금의 결과가 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태영 님의 글이나 유현 님의 글에서도 그런 지점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양립 가능성을 모색했던 노력 자체는 이해가 가지만, 외부에서 보기에는 결국 각자 자기 것만 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였던 게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게 어쩌면 실무자의 관점, 혹은 당 관료의 입장에서 나온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각자의 요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려다 보니, 정작 어느 것도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결국, 다양한 이해관계와 요구를 조율하려다 보니 중심을 잡지 못했고, 이게 녹색당이 당내 민주주의와 선거 전략이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헤맸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준희
지금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저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게 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말씀하신 것처럼 정도를 정하는 문제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하나를 택하면 나머지가 완전히 소멸하는 게 아니라, 두 가지 요소를 어떻게 조율하고 균형을 맞출지에 대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뭐 당내 민주주의에 집중했는데도 선거 승리라는 목표를 세워왔다고 한다면, 실제로 당원들 다수가 선거 승리를 원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는 정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죠.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 당내 민주주의와 페미니스트 정당으로서의 역할은 성격이 크게 다른 문제라는 점이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당내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일 수 있지만, 이는 정당 내부의 운영 방식에 국한된 문제라고도 볼 수 있죠.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는 사회적으로 어떤 방향성을 표방하느냐와 연결되어야 하는데, 정당이 표방하는 사회적 가치가 단순히 당내 민주주의가 지켜지는 사회라고 말하는 정당은 없을 겁니다. 반면, 페미니즘은 정당의 근본적인 사회적 비전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가치입니다. 이는 단순히 내부 운영 원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궁극적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핵심 요소라서 성격적으로 다른 논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페미니즘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드러낼지, 또는 전략적으로 어떤 시기에 더 부각할지는 지도부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식 님의 말씀처럼, 페미니즘이 선택의 문제로 여겨질 수 있느냐를 따져본다면, 녹색당의 출발점에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상태로 굳어져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녹색당은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을 선택의 문제로 두지 않는 정당으로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생각하는 2차적인 문제는 “페미니스트 정당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할 거 같지만, “그게 얼마나 내재화되어 있는가?”라고 질문하면 그건 물음표인거죠. 예를 들어, 2018년 선거를 제외하고, 녹색당이 내부에서 불편한 토론을 촉발하거나,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이슈에서 앞장서서 페미니즘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얼마나 있었나를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페미니스트 정당이지”라는 당위적인 인식은 있지만, 그 인식이 행동과 문화로 내재화되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는 거죠.
태영
아무튼 유현 님의 글이 선거 승리와 당내 민주주의라는 주제에 대해 그것을 택일적인 구도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현 님 글 속에서 그 구도가 어느 정도 드러났고, 그것이 아까 형수님이 언급했던 어떤 위험성과도 연결된 문제처럼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제 글에서도 언급했던 녹색당의 선거 승리를 위한 노력에 대한 진단 역시,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를 단순히 당내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보는 구도는 확실히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우식
얘기를 듣다 보니, 녹색당이 당 밖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항상 최우선 의제로 내세웠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다만, 당내 민주주의 문제에 있어서는, 범일 님의 글이나 다른 여러 글들을 보면, 이것이 단순히 선택의 문제로만 여겨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준희 님이 구분했듯, 당내에서 페미니즘적 문화를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와, 페미니즘에 부합하는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의 문제는 구별되어 논의될 수 있습니다. 특히, 당내에서의 페미니즘적 문화와 관련된 문제는 조금 더 들어보고 싶기는 하지만, 이것이 녹색당의 자부심 중 하나로 작용해 온 측면도 있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여성 운영위원장이 선출되지 않으면 일정한 조치를 취한다든지 하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러한 조치가 제도적으로 설계된 결과인지, 아니면 문화적으로 형성된 결과인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내 민주주의와 관련된 제도적 차원에서, 페미니즘적 조직 문화에 대해 이견이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정책이나 선거 전략 같은 실질적 차원과는 별개의 문제로 보입니다. 당 내에서 페미니즘적 문화를 조직적으로 실천해 온 흐름은 비교적 일관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견이나 논쟁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것 같고요.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할 주제인 것 같습니다.
준희
각자의 경험이 다르겠지만, 말씀하신 대로 대표가 선출되지 못해 자리가 비게 되는 일이 발생할 때마다 여성과반제를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례로는, 당직 선거에 나설 때 성별을 표기하게 되어 있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이는 여성 과반을 지키기 위한 조치인데, 이에 대해 조직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남성이라고 적고 싶은데 왜 비여성으로 표기해야 하느냐”는 등의 불만이 제기된 경우도 있었죠. 이러한 케이스들은 실제로 자주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분들이 외부적으로 발신되는 페미니즘 정책이나 현안 메시지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거나 즉각적으로 삭제를 요구하는 식의 행동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형수
그런 건 조직 운영 원리 관점에서의 반발이었던 것 같아요. 확실히 ‘비여성’ 표기에 대해서 엄청나게 문제 제기를 했던 사람들이 녹색당이 발신하는 어떤 성평등 정책이나 페미니즘 정책에 대해서 ‘이건 잘못됐다’ ‘녹색당이 갈 길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근데 우리가 당내 민주주의를 지키느라 선거에 못 나가고 안 나가고 하기 힘들고, 그 구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게 저도 막 헷갈리네요.
범일
지금 우리 논의에서 당내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여성 과반제 논의와 섞여서 다뤄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 부분이 저도 조심스러운데, 과연 여성 과반제를 실천한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페미니즘 역량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한국 사회가 워낙 엉망이기에, “그거라도 실천하는 정당이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게 무슨 페미니즘이냐, 너무 당연한 걸 하면서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결국 기준이 너무 달라, 이 논의 자체가 시작부터 넓어지고 정리가 어려운 느낌이 듭니다.
우식
당내 민주주의와 관련된 논의는, 녹색당이 페미니즘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올바르게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까지 확장되면 논의가 너무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여성과반제와 같은 정책은 페미니즘적 정책으로 보고 논의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제도 자체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고, 그것이 실제로 작동했는지, 그리고 그 지향에 맞게 운영되었는지는 범일 님의 글처럼 구체적으로 따져볼 문제 같고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조직 문화와 당내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녹색당이 페미니즘적 가치를 얼마나 일관되게 주장하고 실천해 왔는가, 이런 질문이거든요. 이는 외부로 발신되는 페미니즘 정책이나 선거 전략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제 질문은, 당 내부에서 이러한 페미니즘적 가치를 일관되게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상애
제도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별개로 다루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총여학생회가 폐지될 당시 많은 학교에서 후보자가 나오지 않았던 상황이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후보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 폐지의 정당성에 포함되었고, 몇 년 동안 후보가 없었던 상황이 폐지의 이유로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후보자가 나오지 않았는지를 더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총여학생회와 같은 제도를 지키고 싶고, 왜 안 됐을까, 왜 안 나왔을까 이런 논의를 좀 더 이어갈 수 있다면, 이러한 논의가 페미니즘적인 지향이 들어간 토론일텐데요.
그런데 제도를 다시 고민해야 한다고 접근할 경우, 자칫 페미니즘적 가치를 다른 가치와 경합시키거나, 반페미니즘적인 결과를 낳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도가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를 조직 운영 원리나 구조적 문제에 비추어 다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형수
그러게요. 기본적으로 녹색당이라는 정당이 한국 사회에서 처한 위치 자체가 구현하기 어려운 사회적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녹색당이 표방하는 가치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이를 당 내부적으로든 당의 가치를 통해서든 추진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상애 님이 던진 질문이 뼈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제도를 표방하고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왜 유독 여성 과반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인 것 같아요. 자원의 부족이나 어려운 상황 등 여러 제한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문제는 녹색당이 더 깊이 성찰하고 논의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범일
실제로 녹색당에서 “왜 여성 대표가 없느냐”라는 질문은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요.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항상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저도 그 질문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한테는 이 고민이 “우리 당이 무엇을 더 해야 여성 후보가 나올까?”라는 문제로 귀결되었는데요. 당이 부족하거나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여성 후보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더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겠죠.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당 밖의 상황과도 연결돼서 선뜻 대표로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들 중 남성이 더 많은 현실이 있습니다. 반면, 여성 당원들에게는 자리를 제안해도 선뜻 나서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국당이든 지역당이든 마찬가지로, 여성 운영위원장을 세우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부분이에요. .
준희
녹색당뿐만 아니라 다른 조직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점, 그리고 외부적 요인이 크다는 전제는 분명히 있는데요. 저도 이상하다고 느꼈던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역당이나 광역 시도당의 운영위원장 중에는 여성 대표자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도 오랫동안 버텨온 여성 운영위원장들이 있고, 서울이나 충북처럼 여성 운영위원장만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비여성 운영위원장만 있는 지역도 있지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 대표에는 더 여성 리더십이 등장하지 않더라고요. 왜 그럴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현상은 분명히 이상하고, 더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영
아무튼 이건 쉽게 끝날 토론이 아니니까, 앞으로도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페미니스트 정당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정당 그 자체에 대한 문제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라,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논의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뭔가를 딱 정리하기는 힘들 것 같고, 우선 오늘 나온 이야기들을 복기하면서 새로운 논점들을 발굴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상애 님은 질문자로서 오늘 논의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네요.
상애
글쎄요, 질문을 구성할 때는 단순히 드러난 사실에 기반해서 만들었고, 사실 제가 녹색당에 대해 잘 몰라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녹색당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꼽을 수 있을 만한 장면들에 대해 묻는 질문도 생각했었는데, 그런 질문은 논의가 너무 열려 있어서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는 식으로 흐를까 봐 지웠습니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페미니즘만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 수는 없지만, 페미니즘 없이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이런 생각과 함께, 우리가 어떤 정치적 장면들을 비교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민주당이 여성 청년 정치인을 호명하며 정치 무대에 올렸던 사례를 떠올리면, 그 역시 민주당의 정치적 전략이었겠죠. 그런데 그렇게 등장한 그 정치인이 지방에 가서 개발 사업 약속을 하고 다닌 점을 보면, 녹색당의 정치와는 결이 다른 점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사실 녹색당에 긍정적인 의미를 많이 부여하고 싶은 마음에서 질문을 구성했었습니다.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이런 논의를 해볼 수 있어서 좋았고, 앞으로도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제2. 정당의 목적과 목표, 기능
<사전에 공유된 질문(질문자: 범일)>
1. ‘정당은 무조건 선거에 나가야 한다’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럼 선거에 나가지 않으면서 굳이 ‘정당’이어야 하는가는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선거에 나가지 않고 정치적 메세지를 발신하거나, 대중을 동원하는 역할로 만족한다면 ‘선거에 나가지 않는 정당’이어도 된다.
그럼 ‘나’는 ‘선거에 나가지 않는 정당’이 왜 탐탁치 않을까. 정치적 메세지를 발신하거나, 대중을 동원하는 정도의 역할로는 사회적 변화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서이다. 비록 낙선하더라도 권력을 획득하여 정치적 힘으로 – 아주 작은 기초의원의 역할일지라도 –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려는 과정이 매력적이고 참여하고 싶은 일이라서 정당의 당직자로 활동했다.
그래서 현재 우리 모임(다정본+)의 참여자들은 정치적으로 어떤 욕구가 있는지, 어느 방향의 운동성을 좋아하는지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 나아가서 1000만 당원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가 무엇인지, 그들이 원하는게 무엇인지,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그것을 충족시켜 주고 있는지, 진보정당 또는 진보정치세력은 그 욕구를 충족시켜줄 생각은 있는 것인지 등의 이야기도 할 수 있지 않을까.
2. 어떤 사람들이 당원이 되고, 당원이 되는 사람들의 욕구는 무엇일까? 한국의 정당 등록 조건(5000명의 당원, 귀찮은 서류 작업)에 들어가는 노력보다 ‘나’ 또는 ‘우리’의 정치적 욕구가 크면, 정당 등록이 가능해질 수 있다. 하지만 아마 여기 모인 9명의 정치적 욕구(아직 들어보지 않았지만)는 다양할 것이고, 설령 정당을 만드는데 동의를 하더라도 그 욕구를 가다듬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정당을 만든다는 것 또는 정당의 당원이 된다는 것은 소위 ‘흐린 눈’이 필요한 일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듯이, 10개 중에 10개가 맞는 정당은 존재할 수 없고, 욕하면서도 그 정당에 있고 싶은 사람 또는 정당과 자신을 일체화하여서 ‘흐린 눈’조차 필요없는 사람이 정당활동을 하게 되는게 아닌가.
범일
이건 제가 계속 고민하고 있는 주제인데요. 지난번 제주에서 워크숍을 할 때도 굉장히 재미있는 논의를 했던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선거를 하지 않아도 정당 활동을 할 수 있지 않냐”는 이야기가 나왔었죠. 물론 그게 논의의 핵심 포인트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냥 정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럴 거면 왜 정당을 하나요?”라는 질문이 촉발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도 “왜 선거를 하지 않는 정당을 탐탁지 않게 여길까?”라는 점을 생각해 봤습니다. 생각해 보니, 선거를 하지 않는 그 직전까지만 활동하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제 사회적 욕구나 정치 행위에 기여하려는 욕구는, 실패하더라도 선거라는 관문에 들어가는 노력까지 해야 충족되는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이건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여기 모인 분들의 취향이 궁금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사실 이런 활동을 한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2박 3일 동안 밤늦게까지 앉아서 이런 얘기를 했을까? 도대체 어떤 욕구 때문에 지금 정치나 정당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걸까? 이들의 욕구는 과연 선거라는 이벤트까지 포함되는 걸까? 이건 꼭 수단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 같은데, 왜 선거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이 생각을 하다 보니, 민주당이나 국민의 힘, 그 천만당원들에게는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무언가가 있을까? 과연 한국 사람들은 왜 김어준 방송을 보면서 좋아요를 누르는 걸까?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정당의 당원으로 여기지 않는 거잖아요. 소위 진보정당 사람들이 얘기하는 ‘진성당원’의 기준에서 벗어난 거죠. 팬덤 정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그건 또 뭘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당 활동이라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정당과 선거: 선거를 해야만 정당인가?
태영
중요한 질문이고, 저도 계속해서 이 질문을 받다 보니 스스로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리게 된 부분이 있는데요. 저는 정당은 선거를 하는 조직이다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아까 준희 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당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정치 조직화를 하는 것이다라는 의견에도 공감합니다.
정당이나 사회운동단체는 모두 집단적인 의지를 관철시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조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당과 사회운동단체의 차이를 묻는다면, 정당은 정치 조직화를 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운동단체는 정치 조직화와 다른 조직화를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사실 사회운동단체도 어느 정도 정치 조직화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정당과 사회운동단체를 구분 짓는 가장 명확한 선은 선거 정치가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까 범일 님이 언급한 취향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저도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리진 못했습니다. 정당이 반드시 선거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거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도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선거만 하자는 것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결국 저도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정당이라는 개념에 한정해서 이야기하자면, 선거라는 요소가 정당을 구분 짓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형수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다만, 저는 정당을 의회에 참여하려고 하는 조직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에 참여해야 하는데, 의회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선거를 통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거만 하면,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단순히 선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정당이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생깁니다.
만약 정당이 선거를 통해 의회에 참여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 조직이라면, 모든 선거에 반드시 참여해야 할까요? 빚을 내고 사람을 소진시키면서까지 모든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건 또 다른 실무적 고민을 낳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회에 참여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고 조직을 정비하는 의미에서, 한두 번 정도는 선거를 건너뛸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면 “너희는 정당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요.
결국, 어디까지가 각자의 마지노선인지가 문제인데, 이 부분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으니 매번 선거철마다 ‘100년 정당파’와 ‘지금 당장 의회파’가 끊임없이 싸우는 것 같습니다. 양쪽 모두 양보하지 않다 보니, 녹색당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정당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라기보다, 결국 양보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싸움은 서로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처럼 격렬하게 이루어집니다. 한쪽은 “지금 당장 의회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지금 의회에 못 가면 어떻게 할 거냐”며 맞섭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오히려 자원 배분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거를 중심에 두고 보면, 실제로는 “이번 선거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돈이 있냐 없냐”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 같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않고, 강령이나 명분을 끌어와 정당성을 주장하려다 보니 논쟁이 점점 추상화되고, 핵심에서 멀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준희
비슷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어떤 뉘앙스 차이를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정당이 선거를 해야 한다”는 말과 “정당의 지상 목표는 선거 승리다”는 말은 분명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두 주장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고 중요하지만, 결이 다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형수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개별 선거에 대한 참여 여부를 전략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선거에 대해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전혀 나가지 않는 정당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물론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형수 님 말씀처럼 의회 진출이 정치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선거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혁명을 일으키거나, 정당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정치 권력에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급진적인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 이상, 선거가 우리의 거의 유일한 경로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범일 님의 질문에 대해서도, 녹색당도 그동안 모든 선거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개별 선거에 대한 판단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선거를 의도적으로 패싱한다면, “그렇다면 왜 굳이 정당이라는 피곤한 조직 형태를 유지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고요.
우식
정당이 어떤 조직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다양한 관점 차이가 있죠. 그래서 저는 정당 정체성 논쟁이 때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1년에 걸친 여러 토론을 거치면서, 이 부분은 생각보다 사람마다 입장이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거를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선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이고, 중요한 질문은 선거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인가라는 점에서 갈릴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제가 지지하는 정당이 당선되기 어려운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거라는 행위 자체가 일상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우리가 정당에서의 선거를 2년, 4년 단위의 특별한 행사로 인식하긴 하지만, 사실 선거는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어, 단순한 모임에서 대표를 뽑거나, 어릴 때 반장 선거를 경험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선거는 일종의 관성적인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선거가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정치적 문법의 일부처럼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선거에서 당선되느냐를 생각해 보면, 저는 대체로 당선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당선된다고 봅니다. 마치 반장이 되고 싶은 학생이 반장이 되는 경우처럼요. 선거에서는 그 사람이 가장 역량이 뛰어나거나 리더십이 있거나 인품이 훌륭하기 때문에 당선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선거는 무난하고 많은 유권자가 용인할 수 있는 유연한 사람, 또는 특정 급진적 가치를 강조하지 않는 사람이 당선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선거를 통한 사회 변화는 본질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선거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급진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죠. 그래서 선거를 사회 변화의 유효한 수단으로 보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거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좋은 정치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가 대표자로 적합하다고 판단된다면, 저는 기꺼이 그를 돕고 싶습니다. 다만, 정당에 대한 논의에서 선거를 하지 않으면 정당이 쓸모없다는 식의 접근은 꼭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선거가 사회 변화를 위한 유효한 도구라는 전제 자체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정당은 정치 조직으로서 정치적 실천을 하고, 권력을 갖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선거를 통해서만 권력이나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런 맥락에서 정당이 선거를 넘어 다른 방식으로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범일
얘기하신 부분 중에 궁금한 게 생겨서요. 선거를 통해서는 급진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럼 선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급진적인 변화가 가능한가요?
우식
예를 들어, 변화의 수단이 문화적인 영역이 될 수도 있고, 운동적인 영역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무엇이 가장 적합한가?”라고 묻는다면, 딱히 하나로 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운데요. 다만, 선거가 정말 효율적인 수단인가에 대한 의문은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꿈꾸는 사회상이 있고, 그 변화를 실현하고 싶다고 할 때, 만약 그 사회상이 기존 문법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급진적인 면모를 가진 것이라면, 저는 선거보다는 다른 수단에 기대하게 될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물론 선거를 통해 그런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선거를 통해 가능한 변화들은 대체로 더 현실적인 범주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가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선거가 적합한 도구는 아니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이유로 선거가 제게는 그리 매력적인 방식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는 제가 선거에 몰입하지 못하고, 선거에 대해 크게 열의를 갖지 못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준희
우식 님 말씀을 들으면서 든 생각인데요. 저 역시 선거가 사회 변화를 위한 효과적이고 유용한 도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거는 자원이 지나치게 많이 소모된다는 점도 그렇고, 설사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소수정당의 원내 정치가 실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느낍니다. 그런 점에서 선거가 사회 변화를 위한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는 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문화적 영향력이나 제도 권력이 아닌 다른 형태의 권력을 쟁취하며 그 영향력을 키워 나가더라도, 결국에는 정초 선거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정초 선거가 발생하지 않으면, 쌓아 올렸던 문화적이거나 비제도적인 권력들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차원에서 선거는 효과적인 도구는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애
선거를 하지 않으면 정당이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선거가 정당의 정체성을 명확히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계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저는 선거를 “정당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정당이냐”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 선거와 정당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거죠.
예를 들어 녹색당의 경우,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는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이 선거를 통해 더욱 부각될 수 있고, 연합 정당 등 다양한 정치적 형태를 논의하며, 우리가 어떤 정당인지 다시 토론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이런 과정은 단순히 정당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거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정치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인지도 확인할 수 있죠.
그리고 선거를 중심으로 공약이나 정책을 계속해서 세팅하거나 재정비하는 과정이 있잖아요. 그게 다시 정당의 정체성이 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선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선거를 치르면 확실히 굉장히 고양돼요. 제가 막 활동 당원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거철이 되면 자연스럽게 활기가 생기고, “뽑아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요.
태영
저도 사실 선거와 정당의 깊은 관련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에요. 그래서 우식 님이 그걸 분리하자고 제안했지만, 저는 그게 분리가 가능한 질문인지 의구심이 있고요. 그러니까 만약 정당에서 선거가 중요하냐 아니냐가 무용한 질문이라는 것에 제가 동의한다면, 그건 이미 전제된 상태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정당이라는 조직에서는 선거를 치르지 않으면 어떤 논쟁이 주요 의제로 떠오를 여지가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냥 내부적으로 논의하는 수준에서는, 이 안에서 어떤 주장을 주요 의제로 채택할지 말지에 대한 토론이 사실 정당 내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은 대부분 선거를 앞둔 시점이에요. 공직선거든 당직선거든, 이런 논의가 정당의 역동성의 일부라고 봅니다.
또, 우식 님이 아까 얘기했던 여러 가지 선거가 유용한 도구냐는 질문에 대해, 우식 님이 근거로 제시한 여러 주장들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지만, 몇 가지는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예를 들어, 선거가 관성적이라는 얘기에서 반장 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동일선상에 두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느껴졌어요. 의도가 그게 아니었을지라도, 본질적으로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저한테는 납득이 잘 안 돼요.
왜냐하면, 대통령 선거를 단순히 인기투표로 보는 건 냉소적인 접근에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무난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데, 현대 정치에서는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당선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예를 들어, 트럼프는 무난한 사람이 아니었고, 윤석열-이재명 구도를 봐도 둘 다 무난한 인물은 아니었죠. 반대로 반장 선거에서는 무난한 사람이 뽑히는 경향이 있는 게 인기투표의 속성이고요. 이런 차이는 선거가 벌어지는 영역과 맥락에서 나오는 다이나믹스의 차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장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완전히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선거의 유용성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기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이게 하나의 논점이고요.
결론적으로 저는 “정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당은 선거와 깊은 관련이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선거 정치가 제가 가장 선호하는 정치 전략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이라는 정치 조직을 논의의 주제로 소환 한다면 선거는 그 조직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식
저는 이 주제가 하나의 토론거리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일단 반장 선거도 단순히 인기 투표라고는 볼 수 없어요. 투표라는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속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트럼프는 성격상 무난하지 않고, 윤석열도 마찬가지로 무난하지 않은 사람이죠. 하지만 선거라는 것은 결국 널리 받아들여져야 이길 수 있다는 특징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무난하든 이상하든 간에 과반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 선거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특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게임의 룰” 같은 것이죠.
저도 정당에 들어가 “선거를 하지 말아봅시다”라는 주장을 굳이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 산통 깨는 소리잖아요. 만약 그런 논의를 한다면, 지금 우리 논의처럼 이런 질문을 다뤄볼 수 있는 공간에서 하는 것이지, 정당에 속한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선거만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생각하는 것은 정치 조직이라는 개념을 조금 더 넓게 보고 싶다는 겁니다. 정치 조직을 단순히 정당과 동일시하면, 당연히 선거를 해야죠. 선거 정치라는 틀 안에서는 선거를 외면하는 것이 자기모순이니까요. 하지만 “정치적으로 관철한다”는 부분을 중심으로 보면, 선거 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치 조직으로 보지 않는 조직들도 충분히 정치 조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과 정치의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의 상황에서는 정당의 정체성을 더 강화하는 것보다는,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나은 방향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런 맥락에서 반대 의견을 냈던 거예요.
결론적으로, 저는 정치 조직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선거를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의견을 냈던 것입니다.
태영
네, 지금 이야기를 통해 많이 이해가 됐는데, 우식 님 이야기는 정당이랑 정치 조직이라고 하는 걸 분리해서 생각해보자는 제안인 것 같네요. 저도 동의가 됩니다.
은주
제가 녹색당에서 당원으로 활동하며 경험한 바로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여전히 선거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정해진 룰 안에서 의제를 던지고, 논쟁을 촉발시키며, 평가를 받는 과정 자체가 어떻게 보면 상당히 효과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최근 저의 생각을 정리해보면,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장혜영 의원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어쨌든 정치인을 한 명이라도 배출함으로써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층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층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정당이 시민단체와는 다르게 선거를 통해 사회 변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최근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상애
사실 지난 선거와 지지난 선거에서 계속 시민단체 출신 후보자들의 존재와 정치적 행위 방식이 계속 이슈가 되고, 토론의 대상이 되었던 사례가 있잖아요. 특히 최근에는 배복주 님 같은 경우도 이슈가 됐었죠. 이 점에서 보면, 아까 은주 님 말씀을 들으며 떠오른 생각은, 시민단체와 정당이 선거에 결합하는 방식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각자가 해보고 싶은 ‘정치적’인 일들 말하기
범일
아까 제가 말씀을 다소 뭉뚱그려 드린 것 같긴 한데, 사실 여기 계신 분들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고 싶은 것”이라는 건 단순히 1년 뒤에 뭘 할지 같은 단기적인 계획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나 중장기적으로 이 사회에 변화를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다면, 그 욕구를 어떻게 실현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뜻이에요. 물론, 항상 구체적인 로드맵을 그리며 사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저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전에 한 번 설명드린 적이 있지만, 원래는 교회라는 공간에서 공익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에서 교회가 없어지면서 그 목표가 녹색당으로 옮겨졌고요. 녹색당 활동에서 제가 100%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 활동 자체가 모두 의미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녹색당을 통해 만났던 다양한 단체들—인권 단체, 여성 단체, 환경 단체 등—모두 좋은 일을 하는 단체들이었고, 그들과의 연대에도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녹색당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질문이 생기게 되었고요. 마침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정치 조직, 그것이 정당일지 아닐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함께 해보자는 논의를 제안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물론, 이것은 다소 포괄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도 각자 다양한 의제와 욕구를 가지고 계실 텐데, 그중 어떤 욕구가 있는지, 어떤 방향성을 생각하고 계신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우식
저는 지금의 욕구를 간명하게 표현하자면, 좋은 캠페인을 하고 싶은 것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이를 통해 권력과 영향력을 획득하며, 우리가 발신하는 메시지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정당이든, 다른 형태의 조직이든 큰 틀을 미리 정해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당도 물론 나쁘지 않지만 너무 큰 이야기니까요. 지금은 그보다는 우리 얘기가, 이런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닿아 긍정적인 반응을 촉발하고, 이를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어가는 기획을 고민하고 싶어요. 약간 캠페인에 가까운 방식이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논의에 참여하고, 결과적으로는 정치 조직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선거라는 이야기가 지금 저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 이유는, 제가 지금 집중하고 싶은 것이 이런 방식의 활동이기 때문이에요. 만약 선거를 해야 한다면, 우리 모두가 같은 당에 들어가거나 새로운 당을 창당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현재로서는 제가 가진 욕구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요.
태영
질문을 해주셔서 저도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됐어요. 오늘 논의에서 우리가 발견한 벤다이어그램을 떠올려 보면, 정치 조직이라는 것이 더 큰 원을 이루고, 정당은 그 안에 속한 하나의 원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당 외에도 다양한 정치 조직의 실험들이 있을 수 있고, 이미 존재하거나 앞으로 생겨날 가능성도 있겠죠. 그리고 정치 조직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정당”과 “정당이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기준 중 하나가 선거에 대한 입장이나 참여 방법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을까?”를 고민해보면, 지금으로서는 이 큰 벤다이어그램, 더 큰 원에 대해 고민해 보고 싶다는 정도가 있고요. 저는 조직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정치 조직화를 하고 싶습니다. 말해 놓고 보니 웃기긴 한데. 지금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면 그것도 언젠가 도래할 그 순간에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고요. 그 순간에 쓰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이랄까요.
또 저는 이전의 정당이나 정치 조직을 떠올려보면, 범일 님이 이야기 한 흐릿한 렌즈를 통해 사람들이 모였던 것 같아요. 그 흐릿한 렌즈는 모두가 확실한 대상을 보지 않고도 함께할 수 있게 해줬던 도구였던 거죠. 그런데 렌즈가 점점 닦이면서 개인화의 흐름과 함께 나와 조직의 차이가 명확히 보이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조직의 분화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만드는 새로운 정치 조직은 그런 깨끗해진 렌즈를 다시 흐릿하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깨끗한 렌즈를 유지하면서도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게 좀 막연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한테는 이것이 앞으로의 과정에서 꼭 고민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상애
빨간 약(편집자 주: 영화 ‘매트릭스’에서 등장하는 빨간 약이라는 상징) 먹었다는 거죠?
태영
네, 빨간 약을 먹은 거죠, 일종의. 그러다 보니 정당 같은 것이 범일 님 말대로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렌즈가 뚜렷해지면서, 이제 단일 대오 같은 방식은 점점 더 불가능해질 거고요. 저는 그런데 이게 녹색당만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지 않아요. 조만간 국민의힘 같은 곳도 비슷한 상황에 직면할 거라고 생각해요. 렌즈가 뚜렷해지면서 조직 내의 단일성을 유지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질 테니까요.
정당은 어쩌면 하나의 합의를 지향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정당에 큰 도전이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정치 조직화를 고민할 때, 렌즈를 다시 흐릿하게 만들 것인가가 중요한 질문이 될 것 같아요. 저는 이 점이 범일 님과 앞으로 계속 토론할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형수
저는 당분간 정당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는 않고요. 탈당 후 제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요, 결국 모든 운동은 준희 님이 말씀하신 대로 혁명이 아닌 이상, 정당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체제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한—예를 들어 의회 정치가 사라지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지 않는 한—운동이든 의제든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활동은 결국 제도화를 지향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정당이나 의회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수렴 단계 이전의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것이 캠페인이 될 수도 있고, 정치나 정당을 겨냥한 사회운동의 형태일 수도 있겠죠. 어쩌면 정당을 직접 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결국 20년, 30년 후에는 정당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필요성을 설득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좋은 정당의 필요성이나 새로운 정치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시민운동이라면 시민운동이고, 캠페인이라면 캠페인일 겁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는 시민운동을 하고 싶어요. 다만 그것이 단순히 특정 의제 활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으로 수렴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작업이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기반을 닦는다”는 표현이 다소 거창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방향의 일을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준희
저도 지금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진보정당 활동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까 우식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정당이 아닌 방법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귀 기울이게 만든 다음, 관심을 가진 사람들 몇 명이 대화 모임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확장해 나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당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올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순간이 오더라도,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캠페인 집단을 A라고 가정했을 때, A가 하나의 정당으로 귀결되어 소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당을 철저히 도구적인 수단으로 보고 있어요. 필요하면 만들고, 필요 없으면 만들지 않는 것이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사람들이 정당에 가입하는 이유가 정말 자신의 정책적 아이디어를 제도적으로 실현하고 싶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당은 사회적 인정 욕구를 충족시키고, 자신이 정치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표현할 수 있는 도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런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멋진 조직과 분위기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정당이나 선거와 같은 형태의 활동이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애
제가 당장 녹색당을 탈당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스스로를 운동 활동가라고 부르기도,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딘가 머쓱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내일도 볼 사람”과 함께하는 운동의 방법론이에요.
예전에는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싸우면서 활동했던 경험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방식보다 “내일도 볼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싶습니다. 이건 아마 아까 얘기했던 렌즈를 닦는다거나 빨간 약을 먹었다는 이야기와도 연결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런 방식으로 내일도 함께할 사람들과의 경험을 쌓고, 그 속에서 운동의 방법론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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