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녹색당과 우리 진보 정당들이 만나야 하는 곳 | 김우용


『녹색당의 실험과 가능성의 기록: 2010년대 새로운 정당 운동의 유산화』를 연재합니다. 본 연재는 2024년 10월 제주에서 ‘다른 정치의 본령'(이하 다정본) 주최로 열린 워크숍의 논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며, ‘대안정치공간 모색’이 공동 편집하였습니다. 다정본은 녹색당, 정의당 등 정당 활동 경험이 있는 연구자와 활동가가 모여 정당과 정치조직화에 관해 탐구하는 모임입니다.

※ 글에 관한 의견 및 토론은 댓글 또는 teammosaek@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토론문 게재를 요청하시는 경우 검토 및 편집을 거쳐 게재할 수 있습니다.


3부. 내가 만난 녹색당

녹색당과 우리 진보 정당들이 만나야 하는 곳

김우용

정의당 제주도당 부위원장, 정의당 제주도당 청년위원장, 정의당 제주도당 조직국장, 청년정의당 제주도당준비위원장 등 당직을 경험하였다. 현재는 제주지역에서 새로운 진보정당의 방향성을 위해 고민하고, 동료들과 미래의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녹색당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

녹색당과의 거리두기

지난 10여년 가까이 제주에서 녹색당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지만, 동시에 편견이 많았었다. 나에게 녹색당이라는 조직은 정치를 꿈꾸는 동시에 탈정치를 꿈꾸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모순적 조직이라는 선입견과, 개인의 신념이 조직보다 우선하는 조직이라는 선입견이 컸다(속으로는, 조직도 사실 개인의 집합체인데 말이 되는 건가? 그럼 개인이 개인을 이긴다는 건가?라면서 말이다.). 녹색당의 방향성이 옳고 그른지에 논하기 이전에, 딜레마적 상황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조직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렇게 녹색당과 가까우면서 아주 먼 곳에서 정당활동을 해왔다. 사실 녹색당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정의당 가입이 얼마 지나지 않은 2015년이었다. 지인을 통해 처음 녹색당 강령을 읽고서 가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었다. 이런 강령을 추구하는 정당이라면 꽤 매력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녹색당 친구들과 가까워졌다. 이후에는 정의당보다 제주의 녹색당 청년 활동가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녹색당 가입을 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이유도 분명히 있었다. 설득되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결국 정의당을 선택한 이유는 이상을 꿈꾸되, 현실과 타협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조직이었기에 더 큰 애정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녹색당 안에 사람이 있었고, 동료가 있었다

녹색당에도 비록 서있는 위치는 달랐지만,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 나은 세상으로 고민하고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같은 시간에 존재했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시대가 던져준 과제에 대해 각자가 각자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녹색당의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정의당은 어땠는가?에 대한 고민도 정말 많이 했던 시간이었다. 다른 길이라 생각했던 녹색당에서, 활동가들은 오히려 활동가라는 이름 안에서 ‘나’와 너무 비슷한 고민을 갖고, 의미를 찾아가고, 해결에 대한 갈증도 너무 닮아 있었다. 사실 녹색당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동지를 발견한 것 같은 안도와 위로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같은 공간과 조직에 있어야만 진짜 동지일까? 같은 방향을 지향하고, 서로의 길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동지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중앙과 지역정당 활동가 사이에서 발생하는 딜레마, 집단적 리더십이 갖는 한계점, 추첨제 민주주의 역시 나는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으나, 녹색당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히려 현실 가능한 정당 운영 방법 중 하나로 논의해 왔다는 이야기가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역시 모든 상황에는 맥락과 상황이 존재한다. 나의 짧은 식견과 판단으로 인해 오해와 편견으로 녹색당을 바라봤던 것 같다. 이러한 시선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평가도 다음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내가 녹색당 사람들과 함께 토론했던 주제들 중 인상 깊은 장면들을 이야기 하고 싶다. 주제에 들어가기 전, 전국에서 각자의 위치를 지켜온 모든 녹색당원분들에게 죄송한 마음과 동시에 응원과 감사의 마음도 먼저 전한다.

녹색당이 추구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연대’를 어떻게 만들것인가?, ‘우리는 어떤 개인인가?’

녹색당이 지향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에는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과 ‘연대’ 중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우선, 우리는 어떤 ‘연대’를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개인인가?”라는 질문도 필요하다. 

사실 우리 주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적 가치가 아닌 다양한 것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존재한다. ‘나’ 역시 불과 10년 전만 해도, 어쩌면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한 사람이면서, 가부장제의 한가운데 있었고, 기후 위기에 관심이 없었으며, 성소수자 문제는 알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폭력에는 분노하고, 인권문제, 사교육, 불평등에는 분노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지금은 페미니즘과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극심한 불평등 문제에 분노하고 있으나, 또 아이러니하게 사교육에 종사하고 있다. 한 인간도 이렇게 모순적인데, 우리가 바꿔나가려는 세상은 얼마나 더 복잡한 모순덩어리겠는가? ‘나’라는 모습 안에도 수많은 복잡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 모든 개인들과 개인들로 만들어진 사회를 어떻게 연대로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진보와 보수, 자본과 노동자, 여성과 남성, 물질주의와 탈산업화 등 단편적 선 긋기로 만들어진 선언만으로 이제는 전선을 만들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선언적 행동으로 돌격만 외치는, 위와 앞으로만 향해 돌진하는 연대로는 더 이상의 진보, 진보 정치는 만들어내기 어렵다. 이제는 옆으로 확장하는 진보가 나타나야 한다. 나로부터의 확장, 우리로부터의 확장이다.

나는 옆으로의 연대 확장이 녹색당이 지향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그 원동력이 우리의 진보 정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선명성과 정체성은 굳게 가지되, 실현과 활용에 대해서는 더 전략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부터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할지에 대한 ‘여유(물질적, 정신적, 신체적)’ 품이 필요하다. ‘우리 동료와 정당은 왜 그렇게 행동하고 나아가는 걸까?’에 대한 이해와 용서,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용기와 힘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선언적 진보만 추구하게 된다면 선명성의 대결로 치닫게 될 것이다. 지금껏 우리가 실패를 맞았던 “누가 더 선명한가?”에 대한 경쟁에서 계속 머물게 될 것이다. 녹색당의 시간을 다시 바라보며 녹색당이 해왔던 일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게는 더 중요하게 보였다. “그들도 우리와 정말 같은 마음으로 이 일을 해 왔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녹색당 사람들과 이 글을 위한 토론을 하며, 우리는 그렇게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그 신념을 지켜왔다는 생각에 자부심도 느껴졌다. 우리의 확장은 그 연장에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같은 정의당 활동가에게 느꼈던 만큼 강하게 느껴지는 연대감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곳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과 지역 정치인

지역 정치란?

지역 정치를 지키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지역을 강조해야 한다는 누구나 동의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역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결책에는 각자 다른 답을 갖고 있다. 답이 다양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의견에는 동의하면서 다음 행동과 활동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어떻게를 넘어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에 대한 대답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정치 영역에서 ‘지역 정치’라 함은 ‘지리적으로서 지역’과 함께 ‘지역에서 정치행위를 하는 사람’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지역 정치’는 곧, 지리적으로 ‘서울 밖에 사는 지역에 사는 정치인들이 하는 정치행위’를 지역 정치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지역 정치에는 지리적 특성과 지역 정치인(지역에서 정치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이 있을 수 있다. 각각의 지역마다 차이점이 존재하겠지만, 비서울 지역에서 겪고 있는 일반적 고민과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사람이 부족한 지역,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

지역 정치를 하면서 고질적으로 발생하는 이슈는 당연 사람과 자원의 부족이다. 그중에서 사람이 부족하다는 의견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지역 정치인이 부족한 경우는 당의 대외적 상황(지지율과 이슈)에 따라 변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일반적이다. “지역에 출마가 가능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출마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도당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당원 모임이라도 지속 가능할 수 있게 위원장이 나서야 한다” 등 모두 동의할 만한 의견이다. 그러나 과연 어떤 사람이 진짜 필요한 것일까? 지역 정치를 위해서는 지역 정치인이 존재해야 한다. 이 중 어떤 지역 정치인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1유형. 출마하지 않아도 지역 활동을 지키는 사람 

2유형. 출마를 고민하며 지역 활동은 하지 않는 사람

3유형. 출마와 지역 활동을 모두 고민하고 활동하는 사람

3유형의 지역 정치인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진보 정당의 지역 정치인에는 1번, 2번의 유형이 사람이 대다수인 상황이다. 우리는 과연 3유형의 지역 정치인을 만들 수 있을까?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과연 지역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할까? 후원제도, 정치력

3유형의 정치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선거와 출마라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선거가 없는 일상적 정치활동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고민을 넘어선 계획이 필요하다. 정치는 선거라는 펼쳐진 무대만큼이나, 선거 전후 준비하는 기간 동안에도 많은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선거가 없는 시간 동안 우리는 어떤 정치와 정치인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생계도 해결할 수 있어야 하며, 지역의 문제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 있는 자원이 필요하다. 같은 문제여도 책임 있게 해결할 수 있는 정치력도 필요하다.

후원제도로 해결이 가능할까? 이제껏 진보 정당이 많이 해왔던 방식이다. 하지만, 단순한 후원 개념으로는 돌파에 한계가 명확하다. 후원을 누가 할 것이며, 왜 굳이 그 사람을 후원해야 하느냐 하는 정당성의 문제점도 발생한다. 쉽지 않은 문제다. 운이 좋아 만들어진다 해도, 후원자들과 정치인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과 구조적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선거자금법 문제도 발생할 우려가 있다.

정치력은 어떻게 해결하지? 운이 좋아 후원과 생계문제가 해결되는 활동가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정치력을 지속시키는 문제도 발생한다. 지금은 철저하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역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진보 정당의 현실이다.

지역 정치를 위해서는 모순적이지만, 중앙권력 집중이 필요하다

정치 관련 전문 영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아카데미가 열리지만, 연결성과 출마와의 연계 부분, 출마를 하지 않는 활동가를 다시 연결하는 부분에서 운영적 한계가 매번 발생한다. 이런 연결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중앙당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으나,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권한과 자원이 풍부한 중앙으로 권력이 향하는 형태를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정 기간까지는 지역보다는 중앙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견 역시 진보 정당이 중요시하는 권력 분산에 역행한다고 볼 수 있으나, 일시적 타협을 통한 전진 없이는 정당의 성장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천천히 가면 되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으나, 그러기엔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 조직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쩌면 변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전략이 부재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도 하게 된다. 변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녹색당의 새로운 시도, 추첨제 민주주의와 여성할당제

추첨제 민주주의

추첨제 민주주의는 처음 너무 충격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책임과 역할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시기에, ‘녹색당이 너무 무리한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강했다. 내부 사정을 듣고서 납득이 가능했다. 권력의 분산 뿐 아니라, 내부의 활동을 적극 만들어내기 위해 도입했다는 의견을 듣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비활동 당원들의 참여도 독려할 수 있는 제도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나의 우려와 비슷하게 책임과 권한, 리더십의 부재는 자연스레 발생할 수밖에 없다. 추첨제 민주주의는 이상적이긴 하나, 전제 조건들이 더욱 강화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일단 적극적인 참여가 보장된 상태에서 제도가 출발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방향 키를 잡더라도 모두가 협업하도록 잘 이끌 수 있는 조직에서 가능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아무나’가 아닌 ‘누구나’ 정치가 가능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시도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의도와 결과는 분명히 다를 수 있으며, 결과 조금 더 고민하는 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정과 의도에만 박수쳤던 우리의 모습들이 지금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의 모습에도 충분히 만족한다면 이렇게 지내도 괜찮지만, 세상을 더 넓게 연결하고 바꿔나가고 싶다면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할당제

여성할당제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지하는 제도이다. 물론 당위적으로 진보 정당 활동가라면 다수가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정의당도 비슷한 사례로 청년 할당제를 시도했다가 당에 큰 분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위성’이다. ‘당위’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중요하고, ‘역차별’의 모순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증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녹색당과 정의당 모두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그로 인해 지금은 여성할당제도 다수가 동의하는 제도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의당과 녹색당의 정치 시도

2016년 총선에서 정의당은 ‘청년 할당제’로 아주 큰 곤욕을 치렀고, 녹색당도 2024년 연합정당 과정에서 ‘여성할당제 홀수 번호’ 관련 이슈가 있었다. 두 사안 모두 시간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비교적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 정당 내에서도 이런 이슈는 갈등 사안이 된다. 사안의 시급성은 문제를 더욱 키울 수밖에 없기에, 해결 방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결정을 유예하여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고, 다음 시기에 결정하는 방법. 둘째, 권한이 있는 리더가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진보 정당은 관습적으로 후자보다는 전자를 더 민주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모든 것은 양면이 있고 시간의 적절성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모든 사안을 후자로 결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사안에 따라 리더의 결정 권한을 인정하는 조직문화가 필요하다. 모든 사안들을 모두가 다 논의하고 진행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한계성을 알기에 대표와 리더를 선출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민주주의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선출된 리더에게 일정한 책임과 권한 역시 부여되어야 한다. 사실 나는 우리가 리더들의 ‘권한’에 너무 인색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우리가 선택하고 선출한(비록 선거에서 선택한 후보가 아닐 수도 있지만) 리더에게 일정 부분에 권한을 부여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도와 정책을 넘어,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

녹색당, 그리고 정의당이 시도했던 시도들은 분명 유의미한 시도들이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도 발생하는 당위성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는 고도의 이해와 설득의 언어가 발생하는 영역이다. 언어에는 말도 필요하겠지만, 행동과 제도 역시 포함되어 있다. 일관된 행동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인정과 반성, 새로운 상황에 대한 빠른 판단과 책임, 권한을 유연하게 발휘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조직이 되어야 제도, 정책, 정치까지 개혁해낼 수 있다. “메뉴 하나(제도, 정책)로 맛집이 될 수 없다. 좋은 가게(조직)를 만들어낸다면 사람들은 검증보다 신뢰를 먼저 보낼 것이고, 우리는 스스로 좋은 가게(조직)가 될 것이며 비슷한 가게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문화(정치)가 탄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나야 하는 곳

동료가 우리를 지키고, 우리가 동료를 지켜야 한다.

10년의 정의당 활동을 하면서 시작은 동료애로 시작했으나, 과정에는 끊임없는 상처와 갈등이 컸던 경험이 있다. 녹색당의 10년 안에도 비슷한 경험들이 많았을 것이다. 같은 조직 안에 있으면서도, 어쩌면 가장 안전해야 하는 공간에서 서로에게 상처, 시기, 질투, 경쟁 가장 많이 발생하기도 했다. 우리 모두는 모순적이게도 우리의 공동체에서 꽤나 지쳐있었다. 진보 정당의 실패는 외부의 힘도 있겠지만, 외부 상황에서 우리를 지켜내지 못했던 결속력에 더 큰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조직이 지쳐버리는 구조 안에서 활동가들은 각자도생으로 신념을 가지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누군가는 출마, 비활동 당원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녹색당 10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특정 정당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하지 말고, 연결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 진보 정당들은 단순히 뭉치지 못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보 정당의 문제는 단일화나 정책연대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지 못했고, 지켜주지 못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집회나 대책위가 세워질 때 연대하면서도,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회의 준비부터, 결과가 나왔을 때 터져 나오는 원망과 갈등, 질투, 작동하지 않는 리더십까지 다양했다. 거대 양당으로 시작된 위성정당이 시작될 때도, 신념과 기회주의로 나누기 바빴고, 선명성과 정체성에 대한 논의만 하기 바빴다. 왜 그런 논의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야 한다. 명확한 진단 없이는 다음을 세울 수 없다.

‘우리 진보 정당’이 가져야 하는 문제의식은 여기 있다. 우리가 스스로 동료와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의식, 곧 의심하지 않고 더 연결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조직은 커질수록 문제가 더 생길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후에 행여 외부적 상황이 좋아지더라도, 우리 내부 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 내일은 당연히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런 상황이라면, 오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단위만 더 커질 뿐이다.

진보 정당이 가야 하는 길

진보 정치는 새로움을 만들어야 한다. 거대 악에 대항하여 대열을 만들고, 궐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의 진보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거대 악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 거대한 공동체와 연대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 우리 스스로와 옆을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경제, 사회, 물리적 이익관계로 연결하여 운영하는 거대 양당 조직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갖는 새로운 조직은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할까? 

나는 사실 정치가 새로운 상품을 정책과 제도로 만들어내는 것에 큰 반향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정책와 제도는 고착화되어 있거나 서로 기업처럼 벤치마킹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졌고, 누구라도 실현만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상황이라 더 실현가능한 조직에게 지위를 빼앗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만들어 낸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실현시키고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왜’ 팔아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누가,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필요성이 중요다. 정책과 제도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드는 정당만이 변화하는 시대요구에 응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유튜브와 정책연대 정도로 끝내는 것이 아닌, 본질에 가까운 포용과 연결을 꿈꾸는 이상을 과감하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정체성, 당위성에만 몰두하는 정치조직이 아닌, 그 이상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한 조직문화가 필요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넘어서는 단계에 진입하고 새로운 조직을 실현시키는 순간부터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녹색당의 지난 10년은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실패와 도전들을 가장 선두에서 맞이했던 10년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의 시대를 넘어, 정의당과 녹색당의 시대를 넘어, “다음 진보정당의 길은 어떤 곳일까?”에 대한 더 넓은 논의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진보정치가 시대의 부름을 받지 못하여, 각자 도생을 위해 위성정당에 기생할 수밖에 없던 동료들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과 다시 새로운 지향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용기와 용서가 필요하다. 적을 두는 정치로는 진보정당의 발전은 단연코 없다고 생각한다.

※ 글에 관한 의견 및 토론은 댓글 또는 teammosaek@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댓글은 우측 상단 버튼을 눌러 회원가입/로그인 이후 작성 가능합니다.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