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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 만의 개헌 시도가 멈췄습니다. 권력구조 개편 같은 큰 쟁점은 빠진 제한적인 개헌안이었죠. 그럼에도 국민의힘의 불참과 반대 속에 무산되었습니다. 가장 큰 책임은 국민의힘에 있습니다. 동시에 국회 안팎으로 공론 공간을 크게 열지 못한 여당의 무능과 무책임도 가볍지 않습니다. “원래 개헌이 이렇게 조용한 일이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한편, 이번 일을 보며 개헌의 어려움을 생각해봤습니다. 진보진영에서는 공공성, 생태, 돌봄, 노동권, 지역자치 같은 가치를 헌법에 담자는 논의가 오래 이어져 왔고, 꽤 급진적인 제안들도 진지하게 논의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무산된 개헌안은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모순은 아예 다루지도 못한 최소한의 수정이었음에도 통과되지 못했죠.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진일보한 가치를 헌법에 새기는 일은 얼마나 어려울까요.
멀게만 보였던 가치가 헌법의 문장이 된 사례들은 있습니다. 2008년 에콰도르 개헌은 자연을 활용과 보호의 대상을 넘어 권리의 주체로 끌어올렸습니다. 선언에 그친 조항도 아니었습니다. 자연의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누구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국가는 자연의 권리 훼손을 막을 책무가 있으며, 훼손된 자연은 원상회복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 것이죠. 이 조항들은 이후 개발과 자연의 권리 보호가 충돌하는 소송에서 상징적인 판결들이 등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사례를 한국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에콰도르 개헌은 제헌의회를 통해 국가의 기본 질서를 대폭 수정하는 과정이었고, 국회 의결 없이 국민투표로 가는 절차였기에 작동하는 정치 전략도 달랐습니다. 개헌 이후의 현실도 복잡합니다. 에콰도르에서는 여전히 아마존 개발과 추출주의를 둘러싼 투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진보적 가치가 헌법에 들어가더라도 정부와 기득권은 언제든 자기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고, 그래서 개헌 투쟁은 개헌이라는 절차에 갇히지 않고 개헌 이후의 투쟁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에콰도르 사례에서 얻고 싶은 힌트는 있습니다. 자연의 권리라는 급진적 조항이 헌법 한쪽에 어색하게 끼워 넣은 문장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 뒤에는 ‘부엔 비비르’, 좋은 삶에 대한 세계관이 있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 공동체적 삶, 개발 중심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이 헌법 전체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부엔 비비르는 급조된 언어가 아니라 원주민 공동체에 오래 뿌리내린 관점이었고, 변혁과 해방을 외치는 운동은 그것을 헌법의 언어로 끌어올렸습니다. 자연의 권리가 그저 당위적이고 멋진 말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에콰도르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좋은 삶’의 요소로 자리 잡는 과정이 선행된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어떤 삶을 좋은 삶이라고 부를 것인지 계속 말하고, 무엇이 그 삶을 가로막고 있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언어로 풀어내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너무 당연한 답이죠. 심지어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공성, 생태, 권리, 지역자치를 이야기해왔으니까요. 하지만 패치워크처럼 조각조각 붙은 진보적 가치들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만들고, 그 세계관 속 좋은 삶의 모습을 구체적인 언어로 말하는 작업은 의외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 만연한 능력주의와 각자도생 문화, 전 국민의 투자자화까지, 오늘날 개헌 작업이 서 있는 길은 유독 험난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진보적 요구를 대신 말하고 이어붙이는 것을 넘어, 그것들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재구성하는 일, 그리고 그 세계관 속 좋은 삶을 사회의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곧 개헌 운동이라면 어려워도 가야 할 길이겠죠. 그리고 저는 그 핵심 주체가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곳곳에서 나온 요구들을 하나의 사회 기획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정당이 존재하는 핵심적인 이유니까요. 여러모로 고난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진보정당이 다시 기대를 얻을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작업을 통해서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