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토건국가였는가 ─ 토건국가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서장: 왜 토건국가였는가

이 글은 2011년 일본 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에서 출간된 『고용연대사회: 탈토건국가의 공공사업(雇用連帯社会:脱土建国家の公共事業)』의 서장 「왜 토건국가였는가(なぜ土建国家だったのか)」(이데 에이사쿠(井手英策) 著)를 저자와 출판사의 정식 허락을 받아 번역·게재한 것입니다.

번역: 이태영(greatyoung22@gmail.com)

토건국가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1. 고도경제성장기: 자민당에게 있어 공공사업의 필요성

먼저 ‘왜 일본은 토건국가로의 길을 걸었을까?’라는 질문부터 시작해보자.

일본의 재정사에서 공공사업은 예로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유명한 것이 전전(戰前)의 다카하시(역주: 다카하시 고레키요 (高橋是清))는 제20대 내각총리대신(1921년 11월~1922년 6월)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재무관료이다.) 재정이다(다카하시 재정에 대해서는 이데 에이사쿠(井手英策)의 『다카하시 재정 연구(高橋財政の研究)』(2006) 참고). 1929년 발발한 세계대공황 당시 일본 정부는 일본은행이 인수한 국채를 활용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실시했고, 선진국 중 매우 빠르게 공황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정부가 창출한 수요는 제조업과 건설업의 확대,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재촉하였으나, 전시 체제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산업의 상당수는 군수산업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이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당시 선진국들의 공통적인 경향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사정이 다른 선진국과 달랐던 점은, 패전과 헌법 9조에 근거한 군사력 포기로 인해 군수산업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본 정부와 점령군은 점령기에 공공사업 예산을 확충함으로써 실업자를 구제하는 동시에, 군수산업을 민수산업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전쟁을 거치며 규모를 비약적으로 확대한 중공업은 전후 일본 경제성장의 원천이 되었고, 공공사업은 그것을 지탱했다.

고도경제성장기의 재정 정책을 살펴보면, 소득세와 법인세 감세가 매년 실시되었으며, 식량관리제도나 지방재정대책과 더불어 공공사업은 핵심 시책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공공사업은 점차 기업의 경제활동 기반을 정비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특히 소득배증계획(역주: 所得倍増計画. 10년 내 국민 소득을 2배로 올리겠다는 목표로 1960년대 이케다 내각에서 추진한 경제 정책)이나 전국종합개발계획 등 국가 주도의 경제계획에 의거하여, 도로나 항만, 철도 등의 산업 인프라를 건설하는 데 재정이 집중 투입되었다. 이는 제조업과 건설업의 기술력 및 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며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55년 보수합동(역주: 1955년 분열되어 있던 일본의 보수 정당들이 통합하여 자유민주당(자민당)을 창당한 사건. 이를 기점으로 자민당 장기 집권의 기반이 되는 ‘1955년 체제’가 성립되었다.) 이후, 이러한 정책은 여당인 자민당의 정치적 목적과 이익 분배의 도구로서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게 된다. 특히 혁신세력(야당 성향의 진보 세력)의 영향력이 농촌 지역으로 확장되는 것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고도경제성장에 따른 건설업과 제조업의 기술력 향상은 농업의 기계화를 진전시켰다. 동시에 공공사업의 가장 중요한 시책인 ‘농업농촌정비사업'(1960년 이전 명칭은 식량증산대책사업)을 통해 농업생산기반의 강화가 도모되면서 영농 경영의 대규모화와 효율화가 나타났다. 이는 농촌의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노동시간의 급격한 단축을 가져왔으며(2010년도 제3회 농업농촌진흥정비부회(農業農村振興整備部会) 『농업생산기반의 정비와 보전관리에 대하여(農業生産基盤の整備と保全管理について)』), 그 결과 농촌에는 잉여 노동력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더 유리한 취업 기회를 얻기 위해 전업농가에서 겸업농가로 서서히 변화해 갔다. 이러한 변화는 농가 소득의 증대, 기계 설비의 추가 도입, 잉여 인력의 증가라는 순환 구조를 낳았다. 또한 농가의 건설업으로의 업종 전환도 이뤄졌다. 그리하여 농촌에서는 공공사업이 제공하는 계절 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자민당이 실시한 이익 분배 정치에 차츰 포섭되어 간 것이다.

이는 이케다 내각(역주: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이어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의 내각)이 표방한 ‘균형재정’ 노선과도 정합적인 구조였다. 애초에 공공사업은 보조금이라는 자금을 이전하는 방식으로 실시되므로 공무원을 늘릴 필요가 적다. 그리고 공공사업을 통해 소득을 간접적으로 보장하며, 저소득층의 교육, 의료, 복지 서비스를 정부에 의지하지 않고 시장에서 직접 구입할 수 있게 되고, 이러한 서비스의 공급을 담당할 공무원 증대를 억제할 수 있다. 전후 일본은 공무원 수로만 보면 선진국 중 가장 ‘작은 정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공공사업을 중시하는 대신 인력을 필요로 하는 대인사회서비스를 극도로 억제해 온 것과 깊게 관련이 있다.

또한, 공공사업은 사회보장을 대체하는 기능도 수행했다. 도로나 교량, 항만 시설 등을 건설하는 공공사업은 저소득층에 대한 재분배 효과가 강하다. 여기에 1961년 국민개보험과 국민개연금 체계가 정비되면서, 저소득층은 공공사업으로 얻은 소득을 바탕으로 사회보험료를 납부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공공사업은 저소득층을 생활보호 수급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취업을 통해 국가의 사회보험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완수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소득층은 납세자가 된다. 말하자면 전후 일본의 복지국가 모델에는 원리적으로 워크페어(역주: Workfare. 한국에서는 ‘근로연계복지’라고도 부른다.)가 가능하도록 제도 설계가 이루어져 있었던 셈이다.

2. 혁신세력의 대두와 자민당의 전략

이상에서 보듯이, 자민당의 관점에서 보면 공공사업에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고, 그렇기에 일본 복지국가의 중심축에 공공사업이 배치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리적인 이야기일 뿐, 여전히 유럽형 복지국가를 선택할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토건국가의 길을 걸었을까? 본 항과 다음 항에서는 정부가 ‘역사적 조건에 순응하는 과정’을 중시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 질문에 답해보고자 한다.

고도경제성장이 가져온 경제적 변동은 새로운 정치 상황을 낳고 있었다. 경제의 급성장과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공해, 사회복지의 빈곤, 지가 폭등 등 새로운 도시 문제를 야기했다. 그 결과 반자민=혁신 세력에 대한 지지가 강해졌고, 1967년에는 미노베 료키치(역주: 美濃部亮吉. 1967년부터 1979년까지 재임한 혁신 가치 지향의 도쿄도지사)가 도쿄도지사에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더욱이 1971년 지방선거 오사카부 지사 선거에서도 혁신계 후보가 승리하면서 도쿄, 오사카, 교토 등 3대 도시를 모두 혁신 지사가 이끄는 국면을 맞이했다. 이듬해에는 여기에 오키나와, 사이타마, 오카야마가 추가되었다. 도시 지역으로의 인구 유출이 농촌의 지지 기반을 흔들면서, 자민당 정치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온 것이다.

한편, 재정이 담당하는 역할은 점차 커졌다. 올림픽 종료와 함께 찾아온 1965년의 증권불황 당시, 산요특수제강(山陽特殊製鋼)의 도산과 야마이치증권(山一證券)의 파탄 위기가 일어나자 정부는 해당 연도의 보정예산에서 재정법 제정 이후 첫 번째 국채 발행을 시작했다. 게다가 1971년에는 닉슨 쇼크가 발생하여 달러화가 폭락하고 엔고 압력이 높아졌다. 일본 경제의 중기적인 하락이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이후 내수 확대와 적극적인 재정 출동이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1970년대 자민당은 혁신 세력의 정책을 선점하고 본격적인 재정 정책을 단행한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1973년의 ‘복지 원년(福祉元年)’ 선포다.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역주: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이어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총리의 내각)은 노인 의료비 무료화, 5만 엔 연금 및 물가 연동제(물가 슬라이드제) 등을 실시했다. 그 결과 사회보험과 사회복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보장관계비가 급증하여, 1970년대 중반에는 일반회계 중에서 공공사업관계비를 상회하는 규모에 도달하게 된다(그림 1).

그림1. 공공사업관계비, 사회보장관계비, 재정투융자의 추이(출처: 총무성 통계국 「일본의 장기통계계열 제5장 재정 주요경비별 결산액」)
* 한글 적용 이미지 변환: Gemini

그러나 이러한 사회보장관계비의 증가가 그렇게 대규모인 것은 아니었다. 자민당에게 도시의 이익은 결정타가 아니었다. 애초에 자민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은 어디까지나 농촌이었고, 마침 1970년대에는 3대 도시로의 인구 유입 추세가 확실하게 꺾이고 있었다. 이에 다나카 내각은 사회보장을 확충하는 동시에 ‘일본열도개조론’을 전면에 내세워 지방 경제의 활성화와 고용 창출을 모색하게 된다.

그림2. 3대 도시권의 인구 유입 초과수(출처: 총무성 통계국 「주민기본대장 인구이동보고 연보」)
* 한글 적용 이미지 변환: Gemini

<그림 1>을 다시 살펴보자. 확실히 1970년대 중반에는 일반회계의 사회보장관계비가 공공사업관계비를 상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로 실시되어 온 정책이 있다. 바로 재정투융자를 통한 산업정책이다. 이전 시기의 틀에서 이를 정의하자면, 우편저축이나 연금적립금 등을 재원으로 삼아 정부가 정부 관계 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에 대부(융자)함으로써 시행하는 사업을 가리킨다. 융자의 결과로 행해지는 사업은 통계상 민간자본형성으로 취급되고, 공공사업의 정의는 예산총칙이 가리키는 건설국채 대상 경비이므로, 재정투융자와 일반회계의 공공사업관계비는 구별된다. 다만, 재정투융자의 세부 내용에는 주택 건설, 학교 시설 건축, 도로·항만·교량 정비, 생활 환경 개선과 같이 상당 부분이 공공투자로 간주될 수 있는 사업이 포함되어 있다. 다나카 내각 이후 이 부문의 성장세가 높아져 가는 것이다.

재정투융자까지 아우른 공공사업 정책이 1970년대에 거둔 효과는 매우 컸다. 농촌의 잉여 노동력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동하고 있었다. 특히 첫째가 농업을 물려받으면, 둘째나 셋째 자녀들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기에 이들의 도시 이동은 한층 더 활발했다. 그러나 공공사업을 통해 농촌에 고용이 창출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농촌에 일자리가 생기자 자녀들이 농업 종사자(부모나 첫째)의 근처에 머무르며 살 수 있게 되었고, 자민당은 농협을 통해 이들 농업 종사자를 조직화하여 그 가족까지 지지층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즉, 일반회계로는 도시 중간층을 겨냥한 복지를 확충하고, 재정투융자로는 농촌의 고용을 확보한다는 자민당의 전략이 유효했던 것이다.

물론 자민당이 공공사업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다나카 내각은 1972년 총선거에서 대패한 이후 중소기업 대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혁신자치체(역주: 1960~70년대 일본에서 자민당 중심의 보수 집권 세력에 맞서 사회당, 공산당 등 진보 성향 야당(혁신계)의 지지를 받아 당선된 단체장이 이끈 지방자치단체)가 실시하던 무담보 대출 제도를 국정 규모로 전격 도입했으며, 대출 인가 권한도 보수 정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상공회의소 지방 지부를 거치도록 했다. 또한, 좌파 계열 중소기업 단체인 민상(민주상공연합회)의 감세 운동에 대항하여 중소기업 대상 면세 조치를 도입했다. 아울러 도시 지역 의원들의 후원회가 적극적으로 조직화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처럼 도시의 노동자와 중소기업 경영자를 흡수하고 농촌의 지지 기반을 재건하는 데 힘쓴 자민당은 세력을 회복해 나갔다. 자민당은 대략 1970년대 말에는 도시 지역에서 혁신 진영의 지사나 시장을 배제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이로써 사회보장을 통한 중간층 배려 정책은 상대적인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3. 토건국가로

1976년 12월에 출범한 후쿠다 다케오 내각(역주: 1976년 12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집권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의 내각)은 이러한 정치적 긴장 완화와 거의 시기를 같이해, 공공사업을 중시하는 노선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간다. 배후에서는 일본에 내수 확대를 요구하는 외압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른바 ‘일·독 기관차론’(역주: 1970년대 후반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에 빠지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당시 막대한 무역 흑자를 기록하던 일본(日)과 서독(獨)에 세계 경제의 회복을 이끄는 ‘기관차’ 역할을 하라고 강력히 요구한 경제 이론)이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1978년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실질 7% 성장을 국제 공약으로 내걸었다. 한편, 후쿠다 내각은 낮은 지지율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지지율을 회복하고 국민에게 ‘세계의 후쿠다’를 어필하고자 세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맡았다.

오일쇼크 이후 경제성장 정체로 고통받던 일본 경제에 이 공약은 가혹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77년도 보정예산에서 공공사업비를 증액했고, 이듬해인 78년도 예산에서는 ‘임시적이고 이례적인 조치’라고 불리는 극단적인 적극 재정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공공사업비는 전년도 대비 34.5% 증가하는 경이로운 성장세를 기록했고, 재정투융자도 전년도 대비 18.7% 증가하며 높은 성장률을 이어갔다. <그림 3>을 보자. 다나카 내각을 거쳐 후쿠다 내각 시기에 이르면, 국제적으로 볼 때 일본의 공공투자 비중이 독보적으로 높아진다.

그림3. GDP 대비 공공투자(정부고정자본형성) 국제 비교(출처: OECD “Economic Outlook Database”)
* 1970~90년까지의 독일 수치는 동독을 제외함 | ** 한글 적용 이미지 변환: Gemini

그러나 불행히도 이를 기점으로 재정 상태는 위기 상황에 직면한다. 일반회계의 공채의존도는 32%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1978년 출범한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역주: 1978년 12월 출범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총리의 내각)은 긴축재정으로의 방향 전환을 시도한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건전재정을 설득하기 위해, 대중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재정투융자의 축소를 요구하는 것은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재정건전화의 기본은 일반회계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지출 항목은 사회보장이다.

이에 따라 오히라 총리가 주창한 것이 바로 ‘일본형 복지사회론’이다. 일본형 복지사회론은 개인의 자구 노력, 가족 및 이웃 간의 상호부조와 연대 등을 중시하는 사상으로, 정부의 사회보장에 의존한 구제를 비효율적이라 비판하는 보수주의적 주장이다. 즉, 사회보장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환기함으로써 세출 증가를 억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사회보장 억제 방안이 마련되는 한편, 공공사업에 대해서는 재정투융자를 통해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틀이 남아 있었다.

오히라 내각 전후로는 세입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도경제성장기에는 기초공제, 배우자공제, 부양가족공제 확대를 통해 매년 소득세 감세가 이루어졌고, 기업 감세도 동시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둔화된 1975년 이후에는 이러한 정책적 감세가 중단되었다.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감세가 멈춘 것이다. 아무리 재정이 어렵다 한들 오히라 내각이 소득세 증세를 직접 요구하기는 어려웠다. 법인세 역시 이미 국제적으로 세율이 높았고 경기마저 나쁜 상황이라 세율 인상이 불가능해 보였다.

이에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서 재정 재건에 열정을 불태웠던 오히라는 소비세 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격렬한 반발과 자민당 내부의 저항을 조율하지 못했고, 결국 1979년 총선거를 앞두고 오히라는 그 구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히라 총리는 그 후 급사한다. 이어 총리 자리에 오른 인물이 스즈키 젠코(역주: 鈴木善幸. 1980년 7월 출범한 스즈키 내각의 총리)다. 스즈키 총리는 오히라의 재정 재건 노선을 계승하여, 이듬해 경제 성장을 전망하며 1981년 법인세의 대증세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는 재계의 거센 반(反)증세 운동을 촉발했다. 결국 그 압력에 밀린 스즈키는 증세 노선에서 행정개혁 노선으로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재정 재건을 위한 법인세 증세 카드도 정책 의제에서 사라졌다. 자민당에 남은 선택지는 행정개혁을 통한 세출 삭감을 주안으로 삼는 ‘증세 없는 재정 재건’뿐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70년대 말 혁신 세력의 강한 저항이 사그라든 자민당이나 증세라는 선택지를 잃어버린 정부에게 사회보장관계비를 시급히 확충해야 할 긴박감도, 실현 가능성도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재정 재건이 추구된 1980년대 전반에는 일반정부 차원에서 사회보장과 공공투자 모두 지출 압축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반회계 예산과 분리되어 국민의 감시가 미치기 어려운 재정투융자는 횡보 경향을 이어갔다. 즉, 실질적인 공공투자는 사회보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대되어 온 것이다. 그러던 중 1985년 플라자 합의와 이로 인한 엔고 불황으로 일본 경제가 침체되자, 재정투융자가 급증하며 공공투자 또한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1965년 국채 발행이 시작되면서 재정 상황이 악화되었음에도, 1970년대에 공공사업이 확대됨에 따라 예산 대비 재정투융자의 비중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커졌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후반 이후 더욱 현저해진다. 심지어 양적인 측면에서도, 버블 경제의 대호황기 속에서조차 GDP 대비 공공투자 비율은 확대 추세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사업을 통한 이익 분배는 경제적 합리성을 넘어 자민당 정치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공공사업을 통한 이익 분배 구조가 가시화될수록, 지방에 치우친 재원 투입은 도시 주민들의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공공사업은 도시 중산층의 이해관계에도 대응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 들어 하수도나 지하철처럼 큰 비용이 들고 농촌에만 국한되지 않는 도시형 인프라 사업의 비중이 증가한 것이다. 여기에 1980년대 후반에는 NTT 주식 매각 대금을 활용한 무이자 융자 사업(역주: 1985년 일본전신전화공사(국영)가 민영화되면서 출범한 NTT의 주식을 정부가 매각하여 확보한 대금을 재원으로 삼은 무이자 융자 제도), 리조트 개발, 대대적인 도시 재개발 등 대규모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이러한 트렌드를 일반회계 예산으로만 감당하려 했다면 재정 규모의 폭발적인 급증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재정투융자가 급격히 증대했던 배경은, 바로 이러한 재정적 난관을 우회하고 완화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번역: 이태영(greatyoung22@gmail.com)

이태영
이태영

사회학 연구자. 대안정치공간 모색 집행위원.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수료. 한국 발전국가와 신자유주의, 토건국가, 사회운동에 관심 갖고 연구한다. 서울 신촌에서 풀뿌리 운동을 경험하고 녹색당에서 선거와 정책을 배웠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공동체적 대안과 정책적이고 제도적인 해법에 두루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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