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건 청사진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 『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

여성 친화적 도시는 그것을 실현하는 데 청사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슈퍼 페미니스트 도시 계획가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새로 시작해 주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가 어떻게 사회를 (젠더, 인종, 성적 지향 등과 관련하여) 조직하는 특정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는지가 보이기 시작하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설 수 있다. 264쪽

“도시는 누가 만들었을까?” 저는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어떤 관점에서 도시를 바라볼 것인지 탐색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도전이나 표트르 대제, 오스만 남작 같은 권력자들의 이름으로 답한다면 정치권력이 도시를 통해 배제 혹은 포용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브라질리아를 계획한 루시우 코스타나 찬디가르를 계획한 르 코르뷔지에 같은 모더니스트 계획가들의 이름으로 답한다면 합리성과 마스터플랜에 매달렸던 현대 도시계획의 특징이나 한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본 축적과 토건성장연합이라고 답한다면 자본주의 도시의 문제점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요. 그럼 이렇게 답한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도시는 돌, 벽돌, 유리, 콘크리트로 쓴 가부장제다”.

앞서 인용한 문장은 페미니스트 지리학자인 제인 다크(Jane Darke)가 쓴 문장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남성 중심적 사고에 입각해 만들어진, 가부장적 공간일까요? 오늘 <도시의 문장들>에서 소개할 책은 페미니스트 지리학의 관점에서 도시를 바라보며 ‘여성 친화적 도시’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입니다. 2022년 출간된 이 책(원서는 2019년 출간)을 쓴 레슬리 컨(Leslie Kern)은 젠더와 젠트리피케이션을 주 연구 분야로 삼고 있는 연구자입니다.

책은 크게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임신과 육아를 하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도시, 도시 공간에서 작동하는 여성의 우정과 연대, 여성이 도시에서 홀로 있을 때 느끼는 불안과 자유, 시위 공간에서의 여성과 사회운동 내의 성차별, 여성이 도시에서 느끼는 공포와 그에 맞서는 이야기 등이 각 챕터를 채우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성이 도시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상황을 페미니스트 지리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며 도시가 누구의 기준에서 만들어졌고 누구를 제약하는지, ‘여성 친화적 도시’는 어떻게 가능한지 이야기합니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은 페미니스트 지리학입니다. 이는 공간이 단순한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 관계와 억압 구조를 반영하고 재생산하는 매개체라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도시를 놓고 보자면, 도시는 결코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며, 남성 중심적인 사회 관계 속에서 남성을 표준인간으로 하여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여성은 이동, 활동, 존재를 제약받는 공간입니다. 즉 페미니스트 지리학은 공간에 나타나는 관계와 권력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도시계획이나 디자인 수법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을 바라보는 남성 중심적 사고를 전복시키는 인식론적 전환을 다룹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간의 생산과 이용에 대해 <여성들의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자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특히 교차성의 중요성을 거의 매 챕터마다 강조합니다. 백인 여성의 안전을 위한 조치가 유색인 거주지의 불안을 증가시키거나 자유를 제약하지는 않는지, 여성의 안전 혹은 더 나은 일상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각종 요소들이 젠트리피케이션을 유발하고 저소득층 여성을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않는지 등입니다. 저자에게 교차성이라는 키워드는, 수많은 정체성과 맥락이 공존하고 상호 영향을 미치는 도시라는 공간에서 다양한 억압의 국면들, 또 다른 배제들을 드러내기 위한 필수적인 관점이 됩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 친화적 도시란 어떤 도시일까요? 여성 친화적 도시의 구체적인 청사진이나 도시 디자인 모음집을 기대했다면 이 책에서 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저자는 도시 공간에서 여성이 겪는 공포를 이야기하면서 “공포는 절대 설계로 없앨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여성 친화적 도시의 핵심은 눈에 보이는 도시의 형태가 아니라 공간의 생산과 이용 과정에서 던지는 <여성들의 질문>에 있기 때문입니다.

휘츠먼은 여자들이 도시 녹지 공간에 공포를 느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을 때 도시 설계가들에게 무시 당했던 경험을 술회한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공원 녹지를 콘크리트로 다 덮어 버릴까요?’. 힐레 코스켈라와 레이철 페인의 연구에 따르면 인도의 폭을 넓히고 조명을 개선했는데도 안전감이 현저히 증가하지 않자 도시 계획가들은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방법이 더 남았죠?’. … .
페미니스트들은 분명 인공 환경의 변화를 위한 운동을 해왔으나 여자들의 안전 부족이 여성을 비롯한 주변화된 집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용이하게 하는 지배의 네트워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공포는 절대 <설계로 없앨> 수 없다. 238-239쪽(강조는 필자)

여성 친화적 도시는 완성된 마스터플랜이 아니라 “완성에의 유혹에 저항하는, <완성> 계획이 없는 프로젝트”라는 것이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멋들어진 청사진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이 프로젝트에 함께 하자며 넌지시 참여를 제안하는 듯한 이 결론은, 교차성과 개개인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 책에 잘 맞는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익숙한 청사진이나 설계도가 없다면, 우리는 어디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도시 계획, 정치, 건축의 과정에 폭넓은 경험을 가진 대표들을 포함시키는 것을 여성 친화적 도시로 가는 시작점으로 삼자고 제안합니다. 여성, 장애인, 빈민, 이주민, 성소수자 등 도시에 머무는 모두는 그 도시를 가장 잘 아는, 각자의 맥락에서 가장 적절한 도시 해석을 해내는 사람일 테지만, 비장애인 내국인 성인 남성이라는 도시의 표준에서는 그저 민원인이나 비전문가, 수혜자일 따름입니다. 당장 서울의 도시 공간 관련 최고 위원회인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30명의 위원 중 여성 위원은 단 5명입니다. 이 견고한 벽을 당장 허물지 못하더라도(서울시 위원회 구성은 굉장히 경악할 만 하긴 합니다), 울타리 밖 위원회라도 된 것처럼 각자의 몸과 각자의 맥락에서 이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질문을 던져보는 자리를 자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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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정체성, 장소(2019). 린다 맥도웰(여성과공간연구회 옮김). 한울

전환의 시대, 지역과 여성에서 길을 찾다(2024). 계명대 여성학연구소 인문사회연구사업단 엮음. 한티재

소하
소하

정당, 도시정치, 도시정책에 관심을 두고 이런 저런 작업을 합니다.

기사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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