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이라는 이정표

정치적 수사학 #3. 권영국이라는 이정표
─ 권영국. 2026. 『농담도 참 못해요』. 사월의책.


권영국은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 수십 년을 ‘거리의 변호사’로 활동하고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베테랑이지만, 노련한 정치인 같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정치인보다는 고지식한 선비에 가까워 보인다. 그의 정치는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는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유일하게 도덕성 문제에서 자유로운 후보였다. 그럼에도 결과는 0.98%, 낙선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다.

아마 지금 진보정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권영국에게 기대하는 것은 깜짝 놀랄 만한 성적표보다는 무너진 진보정치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답일 것이다. 물론 누구라도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권영국 혼자 그 짐을 짊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답은 그를 포함하여 앞으로 진보정치를 이끌어 나갈 사람들이 앞으로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선거는 끝나지만, 정치는 지속되기 때문이다.

올해 출간된 『농담도 참 못해요』(사월의책, 2026)는 언론인 윤지나와 이재훈이 각각 권영국을 인터뷰한 내용이 담긴 대담집이다. 마지막 부분에는 권영국 자신이 쓴 글도 몇 편 실려 있다. 인터뷰어들은 오늘날 진보정치가 처한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이어갔다. 그리고 권영국은 이 책의 제목이 그러하듯이 농담기 하나 없이 모든 질문에 성실하고 자세히 답변한다. 그는 무어라 답했을까.

진보정치는 평범한 다수를 잘 살게 할 수 있는가?

“진보정치는 당위에 가까운 이야기만 한다. 일단 배부르고 보자는 이야기는 안 한다, 이런 인식이 있죠.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하세요?”(윤지나, 65쪽)

“이 상황 맞습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하고 외쳐야 하는데 정의당은 정공법을 쓰는 것 같아요. 정말 정직하고 솔직하게 천천히 설명하는 느낌이랄까요? 매운 맛이 없습니다.”(윤지나, 69쪽)

진보정치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 중 하나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과 관련된 ‘소수자’ 의제나 자본주의, 개발 반대, 기후위기와 같은 ‘거대 담론’에 집중하면서 평범한 다수를 잘 살게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이다. 윤지나는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의 ‘잘사니즘’이라는 슬로건이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권영국에게 이것 이상의 설득력을 발휘할 비전이나 어젠다가 있는지를 묻는다. 실제로 이재명 표 잘사니즘은 집권 이후에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그 핵심 중 하나는 부동산이 아니라 주식투자를 통해 국가도 국민도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스피 8000’ 시대에 진보정치는 어떻게 평범한 다수를 잘 살게 할 수 있을까?

권영국은 주식투자 열풍 뒤에 노동의 가치가 폄하되고 있다는 점을 짚는다. 많은 사람들이 주식시장에 참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주식시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구 5,200만 명 중 주식 투자자들이 1,400만 명 정도라고 할 때, 수적으로도 3,800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 소득에 의존하여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건강한 사회란 열심히 땀 흘려 일을 하고 노동의 대가를 가지고도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갖출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모두가 부자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스스로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사회다. 그런데 ‘주식 권유하는 사회’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노동이 아니라 리스크를 감수하고 투자를 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그 대상이 과거엔 부동산이었다면, 이제는 주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권영국은 주식투자 수익 역시 부동산 투자 수익과 마찬가지로 불로소득이라고 말한다. 주식 투자가 부동산과 달리 생산적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투자금이 실제 기업의 투자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실제 주식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구주(이미 발행되어 유통되고 있는 주식)를 사고 팔고 하는 과정이며, 주식투자는 실질적으로 주식을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실물 경제는 나아지지 않는데 주가만 올라가는 상황이다. 이는 주식투자의 투기적 성격이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현재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주식투자 권유는 부동산 투기 과열에 대한 대안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면서 지지 세력을 만들어 가는 통치의 기술에 불과하다고 냉정히 진단한다.

결국 주식을 통해 자산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다. 이는 주식투자가 사회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주가가 계속해서 오른다고 하지만, 실제 주가 상승으로 인한 시세 차익으로 자신의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한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모든 시장이 그렇듯 주식 시장에도 승자는 존재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승자는 소수라는 점이다.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는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노동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권영국의 입장이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과 관련된 ‘소수자’ 문제가 ‘먹고 사는’ 문제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식시장에서는 인종, 국적, 성별, 성적 취향, 종교, 학력에 따른 명시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실제 노동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순간 채용이 안되고,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이들을 향한 차별을 제도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이다. 건강한 사회라면 이들에게 투자를 권유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해줄 수 있어야 한다.

권영국은 이런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단지 도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개인들에게도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아들에게 했다는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시험에 통과한 사람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아야 되는 거고 나머지는 그건 네가 못한 거니까, 능력이 없으니까 감수해야 돼. 이런 논리로 차별하고 그러는 게 정말 너무나 당연한 사회가 된 것 같다. 아들, 너는 어떤 길을 택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 낙타가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바늘구멍 같은 경쟁에 뛰어드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니면 그런 서열과 위계를 평평하게 만드는 노력을 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그리고 어떤 사회가 더 행복한 사회인 것 같아?”(66). 나의 이기적 욕심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불행한 상태를 감수하게 만들기 보다는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모두에게도 합리적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권영국의 대답은 노동자들의 정당을 자임해 왔던 정의당이 역사적으로 말해 왔던 ‘정답’에 가깝다. 물론 앞서 인용한 윤지나의 말처럼, “정공법”이고, “매운 맛”은 없는 심심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의 신성함과 불로소득의 부당함을 과도하게 대립시킬 필요는 없지만, 코스피 시장이 노동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노동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정치의 언어가 필요하다.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와 노동 문제에 있어서 권영국의 모습은 일관되고, 단호했다.

정의당은 왜 실패했는가?

“지난 몇 번의 선거에서 정의당이 좋지 않은 성적을 거뒀어요.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득표율이 많이 떨어졌고, 급기야 국회에서도 원외로 밀려난 상황입니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에게 외면을 받았다고 볼 수 있을 텐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이재훈, 146쪽)

다음으로 할 이야기는 정답보다는 해답이 필요한 이야기다. 이재훈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정의당이 시민들에게 외면을 받은 이유에 대해 묻는다. 권영국은 거침없이 네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첫째, 진보정당이 반복적으로 분열되었고, 여의도 정치에 매몰되면서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진보정당들은 계속해서 분열하고 반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많은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싸움으로 여겨졌다. 원내정당이었던 정의당 역시 국회 의석을 지키는 데 급급하면서 기성 정당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가 많았다.

둘째, 2019년 ‘조국 사태’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지지층을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권영국은 정의당이 “당시에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과정에서 결국 엘리트 집단 손들기를 해줬”다고 평가한다(147). 이로 인해 정의당은 ‘정의 없는 정의당’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적어도 당위의 문제에 있어서는 비교적 일관된 모습을 보였던 진보정당이 정당성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조국 사태에 대한 정의당의 대응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조국의 반성 없는 태도와 이재명 정부의 무리한 특별사면을 문제삼는 모습을 보였다. 정확한 진단이지만, 이 문제가 정의당과 진보 진영 내부에서 첨예한 갈등을 낳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애초에 왜 그런 선택을 했고, 내부 갈등을 낳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이루어지지 못한 부분은 아쉽다.

셋째, 페미니즘 논쟁에 휘말리면서 내부 갈등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권영국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장례식 조문을 둘러싼 논쟁과 김종철 전 정의당 당대표의 성추행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를 계기로 페미니즘 논쟁이 일어났고 “이 논쟁이 다른 이슈들을 모두 다 빨아들이는 상황으로 가게 되고, 이에 대한 노동 현장 등의 반발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147). 그는 이러한 반발이 “깊이 있는 비판은 아니”였다고 짧게 언급하지만(147), 어떤 점에서 비판이 있었고 그러한 비판이 정당했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대체로 페미니즘 논쟁이 지지층의 이탈을 유발한 원인인 것처럼 묘사된다. 페미니즘의 ‘미러링 전략’이 소수자들이 처한 차별과 억압의 구조에 대한 문제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도 그렇다. 그는 진보정치가 페미니즘의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 데는 동의하지만, 페미니즘 논쟁이 왜 정의당 실패의 원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다소 모호하게 다가온다.

넷째, 노회찬·심상정 이후 리더십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대중정당에서 ‘스타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선 대담에서 그는 대중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매력에 대해서도 “노회찬 대표처럼 유머도 있고 부드러운 이미지” 그리고 “전투적이고 강한, 매우 일관성 있고 지도력 있는 리더십” 중 어느 것도 가지지 못했다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30). 특정 인물이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상황이 더 심해지고, 사람들이 진보정당에도 대선 주자급의 무게감 있는 정치인의 등장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리더십의 문제가 공백으로 남아 있다는 진단이다.

전반적으로 권영국의 답은 진보정당의 분열과 리더십 문제, 즉 정의당이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은 원인에 대해서는 명쾌하지만, 조국 사태와 페미니즘 논쟁과 같이 지지층 내부의 이탈과 논쟁을 낳은 문제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 문제들에 대한 권영국의 답은 진보정치가 현재 처한 현주소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보정치의 역사적 분열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리더의 출현에 대한 문제의식은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지만, 여전히 조국 사태와 페미니즘 논쟁을 어떻게 돌아볼 것인가의 문제는 남아 있다. 권영국의 답은 적어도 특정 사안에 있어서 선을 넘지 않는 신중한 답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정의당과 진보정치의 실패에 대한 답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인상을 준다.

누구와, 어떻게 연대/연합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권영국이 지향하는 진보정치의 조직화, 세력화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먼저 그는 내란과 폭력을 옹호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의힘 지지자들 역시 진보정치가 설득해야 할 대상이지만, 내란과 폭력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닌 그런 ‘태도’는 소멸시켜야 한다”고 힘주어 이야기한다(93). 민주적인 질서와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룰이 존재해야 하는데, 점점 극우화되고 있는 국민의힘과 지지자들의 ‘태도’는 명백히 소멸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준석과 같은 정치인들이 “기존의 보수정치세력보다 더 극우적인 사고를 가진 것 같”다고 말한다(97). 약자에 대해 공격하는 강도가 훨씬 높기 때문이다. 전장연 시위 사례를 들면서 그는 이준석으로 인해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방식의 시위나 운동들, 불편하지만 동시에 미안한 마음, 그래서 최소한 거기에 돌을 던지는 행위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던 시민들의 감각”이 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98~99). 이준석은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던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공격을 공적 공간에 끌고 나온 것으로 모자라 그것을 정당화했다. 이는 폭력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내란을 옹호하는 태도 만큼이나 극우적이다.

이른바 ‘중도보수’를 표방한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 세력에 대해서는 집권 초기 산업재해 문제나 대북 관계에서의 선제적인 모습은 긍정적으로 보지만, 성장 중심, 기업 중심 정책으로 치우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진보정치와 명확한 차이가 있다고 평가한다. 그는 중도 보수라는 호명 역시 “이미 설정되어 있는 정치적 방향을 다시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117).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은 1,400만 주식 투자자들을 민주당의 지지 기반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펴고 있다. 그래서 기후, 환경, 노동, 소수자 의제와 같은 진보적 의제는 ‘나중에’, 즉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진보정치의 방향과는 분명히 다르다.

권영국은 민주당이 주도한 위성정당에 참여했던 진보적 원내정당들(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에 대해서도 분명한 선을 긋는다. 이들은 민주당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데, 결정적인 정치적 선택에 있어 민주당의 울타리를 넘어서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위성정당의 반복적인 출현으로 인해 국회는 비례성 강화에 역행하는 방향, 양당정치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위성정당은 진보정치를 희화화하면서 민주당이 지지 세력의 비율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지적한다.

권영국의 답은 ‘범민주당 세력’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진보세력의 구심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화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각 진보정당이 고유한 역사와 지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합당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본다. 녹색당은 기후생태 문제를 핵심 강령으로 삼고 있고, 노동당은 자본주의 폐지와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체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고, 정의당은 자본주의의 틀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전제에서 불평등, 양극화, 차별 문제 등을 극복해 나가는 ‘사회복지국가론’과 같은 대안을 이야기해 온 정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당보다는 서로가 가진 정체성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한 연대 또는 연합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그는 이를 위해 한국에도 이탈리아의 ‘올리브연합’이나 스페인의 ‘인민전선’처럼 비슷한 세력이 연합해서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진보정치 세력의 재구성과 재편에 관해서는 2028년 이전에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을 창당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민주주의, 기후, 불평등 문제를 가지고 싸워 왔던 세력들이 새롭게 연대하여 국민의힘과 극우 세력, ‘범민주당 세력’에 대항하는 정치 세력을 만들어 내자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입장이지만, 권영국은 독자적인 진보세력의 연대와 연합에 대한 나름의 명확한 상을 제시한다. 진보정당 분열의 역사를 고려할 때, 이러한 연대/연합이 쉽게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권영국이 지난 대선과 이번 지방선거에서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을 포함한 진보정당들과 급진적 사회운동 세력의 지지를 대체로 무리 없이 얻고 있고, 선거를 거치며 이들 간의 연대/연합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어쩌면 진보정치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심상정, 노회찬이 아니라 이 연대/연합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인일지 모른다. 분명 그 과정에서 권영국이라는 리더의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권영국이라는 이정표

권영국의 답은 때로는 해답과 거리가 먼 고지식한 ‘정답’에 가깝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정답 없이 해답에 다다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의 답은 현재 진보정치가 처한 상황과 그 속에서 고투하고 있는 한 정치인의 위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해답을 향한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새로운 논의의 시작점으로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여기서부터 출발해 보는 것은 어떨까.

글을 마치며 “노동이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권영국과 진보정치의 외침이야말로 이 시대 어른이 지녀야 할 태도이며, 정치가 회복해야 할 언어”(윤지나, 136)이며, “권영국은 정치와 정책의 언어, 진보의 언어, 현장의 언어를 두루 갖춘 보기 드문 정치인”(이재훈, 142)이라는 대담자들의 평가에 공감을 하게 된다. 특히 “이 시대 어른이 지녀야 할 태도”라는 부분을 다시 되뇌이게 된다. 모두가 평등해지기를 원하고, 어쩌면 모두가 힘든 진보정치 영역에서 어른이라는 말은 이제 낡은 단어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앞으로 그가 존경받는 진보정치의 어른으로 오래 남아 있었으면 한다.


※ 본 연재는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웹진 <인-무브>에 공동게재 됩니다.

현우식
현우식

제주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다.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향했으나, 기대와는 다른 현실을 경험하고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이후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연구자의 길을 선택했다. 말과 글을 매개로 생각과 질문들을 언어로 옮기고 있으며, 이러한 작업이 사회를 보다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라클라우 연구에서 출발했지만, 정치사상과 정치사회학, 정치비평을 넘나들며 말하고 쓰는 일을 이어가고자 한다. 라클라우의 사상은 이 모든 작업을 관통하는 정치에 대한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커뮤니케이션북스, 2025)를 함께 썼다. 제주대학교에서 정치사상을 가르치고 있으며,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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