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토건국가였는가 ─ ① 들어가며

서장: 왜 토건국가였는가

이 글은 2011년 일본 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에서 출간된 『고용연대사회: 탈토건국가의 공공사업(雇用連帯社会:脱土建国家の公共事業)』의 서장 「왜 토건국가였는가(なぜ土建国家だったのか)」(이데 에이사쿠(井手英策) 著)를 저자와 출판사의 정식 허락을 받아 번역·게재한 것입니다.

번역: 이태영(greatyoung22@gmail.com)

① 들어가며

이 글은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재해를 마주한 우리가 10년 후, 20년 후 일본 복지국가의 미래를 이야기하려는 시도이다.

복지국가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중요한 기둥 중 하나로 재정이 있다. 재정은 우리의 개인적인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재정은 인간에게 공통된 ‘필요’를 사회가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공통된 필요란 무엇인가? 그것을 근저에서부터 위협하는 것이 바로 전쟁과 재해이며, 이러한 공동의 곤경을 극복하는 것은 어떤 사회에서나 공통된 필요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나 대규모 재해가 일어나면, 재정에는 곤경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새겨지며, 이는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재정사회학의 사고방식이다.

이 글을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관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재정 결정에 깊게 관여하고 그 집행을 담당하는 행정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행정주체가 적절하게 재정을 운영하여 인간에게 공통된 필요를 효과적으로 채울 수 있다면, 사회적 부담은 가벼워지고 정부에 대한 신뢰는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안정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풍요로운 사회의 기초가 되는 행정과 재정 제도(역주: 원어는 ‘行財政制度(행재정제도)’. 일본에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행정과 재정을 아우르는 관용적 표현이나, 한국에서는 생소한 합성어이므로 맥락에 맞게 풀어서 번역했다.)를 고민한다. 나아가 재정지출의 60%를 차지하며 시민들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인 지방자치단체에 주목하여, 그 현황과 문제, 장래상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부의 역할을 의미하는 ‘공공의 임무(public work)’를 논하고자 한다.

그러나 ‘공공의 임무’라고 해도 그 영역은 매우 폭넓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고용’의 문제이며, “지금까지 지방자치단체가 공공사업으로서 담당해 온 고용의 영역을 어떻게 주민들이 합의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현재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직면해 있다. 그 의미를 생각해보자.

2011년 3월 11일, 전대미문의 대지진이 도호쿠와 간토 지방을 덮쳤다. 지진과 쓰나미를 계기로 지역 경제의 파괴,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오염과 대피 권고, 전력 부족, 풍평(뜬소문) 피해, 소비 정체 등 셀 수 없는 ‘공동의 곤경’이 밀려들었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공통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보정예산(역주: 일본 재정법에서는 ‘추가예산’과 ‘수정예산’을 합쳐 보정예산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추가경정예산과 비슷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편성이나 공공투자 증액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 되었다.

동시에 전후 일본 복지국가를 뒤흔들 만한 거대한 변화도 일어나고 있다. 이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 복지국가의 특징을 파악해야 한다. 196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과 노동운동이 진전된 유럽 각국에서는 연금을 비롯한 현금 급부에 더해 육아, 보육, 요양, 간병과 같은 대인 사회서비스가 확충되었다. 그러한 사회보장의 재원 마련 방식을 보면 북유럽의 조세 방식, 대륙 유럽의 사회보험 방식 등 다양한 복지국가 유형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남성 노동자가 임금을 잃을 위험을 보장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되, 여성의 취업도 촉진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 담당하던 대인 사회서비스를 보완하는 형태로 사회보장이 확충되어 왔다.

한편 일본에서는 기혼 여성이나 지역 공동체, 대기업 등이 정부를 대신해 대인 사회서비스를 공급해 왔다. 더욱이 1970년대에는 공공사업이 증대되면서 토건업과 저소득층에 대한 이익 분배가 강화되었다. 현재 일본의 GDP 대비 사회적 지출 비율은 미국과 함께 선진국 중 최저 수준인 반면, GDP 대비 공공지출 비율은 1990년대 정점 당시 다른 선진국의 2배에서 4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중산층을 겨냥한 감세 정책도 중시되었다. 고도경제성장기에는 조세부담률을 20% 정도로 전망했는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선진국 중 최저 수준의 조세부담률을 유지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일본은 낮은 수준의 사회보장, 특히 취약한 대인 사회서비스를 특징으로 하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공공사업과 낮은 조세부담률을 조합한 경제 대책 및 재분배 정책으로 이익을 분배해 왔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형태를 이 글에서는 “토건국가(construction state)”라고 부른다. 사회보장은 낮은 수준이지만 고용을 보장하고 개인의 부담을 가볍게 함으로써 사회적 연대감을 창출해 온 복지국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의하자. 일본이 결코 사회보장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1961년에 이미 국민개보험(역주: ‘国民皆保険’. 전 국민 건강보험 제도를 의미한다.)과 국민개연금(역주: ‘国民皆年金’. 전 국민 연금 제도를 의미한다.)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미국과 일본을 ‘자유방임주의’ 색채가 강한 복지국가로 묶어 논하는 경향이 있지만, 미국이 두 제도를 지금까지도 실현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그 차이는 역력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73년에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내각에서 연금을 대폭 확충하고 물가 슬라이드제를 도입했으며, 노인 의료비 무료화를 실시했다. 이 시기 이후 일반회계에서 사회보장지출이 급증해 왔다.

즉, 일본 복지국가의 장래를 논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왜 우리나라는 1970년대에 유럽형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닫고, 공공사업에 크게 의존하는 토건국가의 길을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은 제1절에서 논하자.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종래의 토건국가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그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예를 들어, 전대미문의 재정 적자로 인해 증세를 단행하지 않으면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에 대한 포용력은 사라지고 있으며, 공공사업을 통한 고용 보장도 더 이상 사람들에게 ‘공통의 필요’가 아니다. 인구의 과반수가 3대 도시권에 거주하고 도시 지역의 사회자본 정비가 포화 상태에 이른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공공사업이 용인되기 어렵다. 게다가 고령화, 지식집약산업으로의 전환, 여성의 사회 진출이 진행되면서 젊은 남성 노동에 집중되기 쉬운 공공사업에 대한 시민들의 찬동을 얻기도 힘들어졌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제2절에서 논한다. 단적으로 말해, 사회적 연대를 만들어내던 재정 장치가 기능 부전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정치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반영한다. 고이즈미(小泉純一郎) 내각은 구조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공공사업을 대담하게 축소했고, 삼위일체 개혁을 통해 지방으로의 재정 이전을 대폭 삭감했다. 민주당 정권 역시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를 핵심 정책으로 내걸고 공공사업을 세출 억제의 타깃으로 삼았다. 역사적인 정권 교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서만큼은 민주당과 자민당이 명확하게 궤를 같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지진은 시계바늘을 과거의 토건국가로 되돌릴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까다로운 점이다.

상황이 유동적이기에 조심스러운 예측이지만, 적어도 수차례에 걸친 보정예산을 통해 재해 복구 예산은 상당한 수준으로 늘어날 것이다. 재해 복구를 명분으로 채무가 증대되거나 증세가 고려될 수도 있다. 예상되는 것은 이러한 양적인 변화뿐만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민주당 정권의 핵심 정책이자 토건국가 탈피의 상징이었던 아동수당의 재원을 재건 수요(역주: 원문에서는 ‘부흥(復興) 수요’. 일본에서 ‘부흥’은 대규모 재난으로 파괴된 인프라와 삶의 터전을 물리적으로 복구하는 구체적인 행정 용어로 쓰인다. 다만 한국어의 ‘부흥’은 다소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발전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 글에서는 맥락상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재건’으로 옮겼다.)에 충당해야 한다는 논의까지 흘러나왔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대지진이라는 ‘공동의 곤경’은 ‘토건국가로부터 포스트 토건국가로’ 나아가려던 흐름을 오히려 과거로 역행하게 한다.

이러한 ‘역행의 징후’는 사회보장과 세제 일체 개혁을 둘러싼 논의 속에서도 드러난다. 재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공통의 필요’를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보장의 필요성을 깊이 논하기에 앞서 ‘사회보장 목적세화’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고 있으며, 나아가 증세의 범위 안으로 사회보장을 압축하자는 발상이 홀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본말전도다. 게다가 이러한 경향은 정치 주도의 의사결정을 중앙집권적으로 변질시킨다. 예컨대 사회보장 중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자기 부담으로 실시하는 것도 있고, 소비세 5% 중 1%는 지방소비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배려 없이, 오히려 지방은 논의의 장에서 소외된 채 ‘소비세 5%는 국가 사회보장의 목적세’라는 결론으로 흘러가고 있다. 재해 재건이 중앙집권화를 부추기는 촉매가 된 셈이다. 이 역시 과거로의 역행이다.

중요한 것은 재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 노력을 미래의 희망으로 연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처방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재건을 향한 논의는 중요하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이재민과 아픔을 나누어 가지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정의’에 대해 긴장감을 갖지 않은 채 곧바로 공공사업의 증대만을 논한다면, 이는 사회적인 사고가 정지되는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앞으로 논하겠지만, 전후의 경제, 정치, 그리고 사회를 포함해 일본 복지국가를 지탱해 온 요인들은 공공사업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한 상황에서 이번 대지진이 발생했다. 토건국가로의 안이한 역행은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20년’을 되풀이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공공사업을 기반으로 성립한 복지국가의 핵심을 무시한 채, 곧바로 유럽형 복지국가로 대전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 역시 극단적인 논의일 것이다. 혹은 한편에서는 과거로 역행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충분한 논의와 합의 없는 대규모 증세를 추진한다면 사람들의 고통은 불 보듯 뻔하다. 즉, ‘재건 수요가 있으니 공공사업을 멈출 수 없다’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현상 긍정적이며, ‘유럽형을 지향하자’라는 것은 몰역사적이고, ‘재건에 편승해 사회보장도 증세로 해결하자’라는 것은 절망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공공사업을 열망하는 경제주체는 여전히 존재한다. 게다가 단기적으로 공공사업이 감축되기보다는 토건국가로의 물길이 다시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토건국가로의 역행을 막고, 현재의 공공사업을 새로운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공공사업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보다 명쾌하게 말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공공사업은 무엇이며, 정부가 완수해야 할 역할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일본 토건국가의 역사를 바탕으로 그 한계와 문제를 파악한 후, 지방의 현장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공공의 임무’를 재정의하는 착실한 작업에 착수하고자 한다. 재정과 행정에 기대하는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재건 이후에 다가올 미래—즉, 토건국가를 거치면서도 그 한계를 극복한 끝에 찾아올 미래—를 구상하면서, 정부가 고용을 보장하고 사람들이 연대할 수 있는 사회인 ‘고용연대사회’로 향하는 구체적인 여정을 제시하고자 한다.

재건 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눈앞의 위기에 농락당하지 않고 중심을 잡기란 어렵고 혹독한 일이다. 그러나 재건에 매몰된 논의에 사유적 차원의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불가결하다. 이번 참사는 ‘역사의 비극’이다. 하지만 이 비극을 ‘새로운 역사를 향한 원동력’으로 바꾸겠다는 발상의 전환,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바라는 바이다.

번역: 이태영(greatyoung22@gmail.com)

이태영
이태영

사회학 연구자. 대안정치공간 모색 집행위원.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수료. 한국 발전국가와 신자유주의, 토건국가, 사회운동에 관심 갖고 연구한다. 서울 신촌에서 풀뿌리 운동을 경험하고 녹색당에서 선거와 정책을 배웠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공동체적 대안과 정책적이고 제도적인 해법에 두루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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