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와 ‘풍요’에 대한 메모

이 글은 정부의 3대 메가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언급되던 무렵부터 조각조각 적어둔 메모들을 연결한 글입니다. 여러 메모를 이어붙인 탓에 연결이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고, 완결성 있는 글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진보정치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을 활자로 꺼내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공개해 봅니다. 
부족한 부분과 잘못 짚은 부분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진보정치는 오랫동안 사회가 직면한 위험을 발견하고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불평등과 노동착취, 기후위기, 돌봄의 붕괴, 주거불안, 지역소멸, 차별과 배제의 문제를 공론장으로 끌어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도 꾸준히 제안했다.

그럼에도 진보정치가 어떤 미래를 만들려는지 묻는다면, 요즘은 그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개별 요구와 정책은 많지만 그것들이 모여 어떤 사회를 이루는지는 선명하지 않다. 문제를 해결한 뒤 사람들이 어떤 하루를 살게 될지, 그 사회가 지금보다 왜 나은지, 서로 다른 투쟁이 무엇을 함께 만들려는지 설명하는 언어도 충분하지 않다.

흔히 이를 두고 진보정치는 반대만 하고 대안이 없다고 말한다. 정확한 진단은 아니다. 현실의 저항에는 이미 다른 사회의 원리가 들어 있다. 부족한 것은 대안의 씨앗보다 그것을 연결하는 정치다. 각각의 투쟁에 담긴 원리를 하나의 사회상으로 발전시키고, 그 사회에 이르는 경로를 제시하는 작업이 충분하지 않았다. 진보정치의 약점은 사람들이 오늘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을 해소하고,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약속을 충분히 만들지 못했다는 데 있다. 진보정치의 반대에 있는 무한성장을 지향하는 정치가 문제 해결과 미래의 약속을 충실히 수행했단 의미는 아니다. 이미 정치적, 물질적, 문화적 기득권을 가진 정치 세력은 어떤 우려를 쉽게 뭉개고 지나갈 수 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보정치는 보수정당의 반대편에 놓인 정치세력 전체를 뜻하지 않는다. 불평등과 착취를 줄이고, 생태적 한계 안에서 삶의 기반과 경제의 결정권을 민주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정치적 흐름을 가리킨다.

모든 정치는 위험을 말한다

성장정치는 풍요를 말하고 진보정치는 위험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장정치는 투자와 일자리, 소득과 소비, 자산가치의 상승을 약속한다. 진보정치는 기후위기와 불평등, 노동착취의 위험을 경고한다.

그러나 성장정치도 강한 위험의 언어를 사용한다. 투자가 줄면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첨단산업 경쟁에서 뒤처지면 국가가 쇠퇴한다고 경고한다. 개발하지 않으면 지역이 소멸하고, 자산가치가 하락하면 가계의 안정이 무너진다고 주장한다. 기업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미래세대가 가난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대기업 주식을 사지 않으면 깡통을 찰 것이라 말한다. 국가적 차원의 FOMO를 유발한다.

성장정치가 제시하는 위험은 대체로 즉각적이다. 일자리와 소득, 집값과 지역경제처럼 개인의 생존과 바로 연결된다. 그리고 투자, 개발, 산업육성, 자산가치 상승을 그 위험에 대한 해법으로 내놓는다. 내 통장 잔고에 직결되는 것만 같다. 진보정치가 말하는 위험은 성격이 다르다. 기후재난, 생태계 파괴, 불평등, 독점, 돌봄의 붕괴, 민주주의의 약화처럼 사회의 구조와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다룬다.

진보정치가 말하는 위험도 모두 실재하고, 절박한 문제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몇몇 위험은 내 통장 잔고에 직결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물론 기득권을 가진 성장정치와의 발언력 차이라는 뼈아픈 현실이 있다. 그런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진보정치가 말해 온 위험이 개개인에게 체감되는 위험으로 제대로 번역되고 있는지는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시 위험의 정치로 돌아가면, 성장정치는 구조적 위험을 축소하는 대신 개인의 생존 불안을 선점했다. 이 선점은 현실 정치에서 큰 힘을 갖는다. 산업시설이 지역의 자원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을 아는 주민도 그 산업시설 유치에 실패할 때 지역경제가 어떻게 유지될지 두려움이 있다. 부동산 불평등을 비판하는 사람도 자신의 집값이 급락하면 삶이 불안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연금과 주식 시장을 통해 상당수의 국민이 기업 이익과 연계되어 있는 최근의 상황은 이런 현상을 강화한다.

하지만 이를 이기심이나 성장주의적 욕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것은 성장 그 자체보다 생존의 가능성일 수 있다. 기존의 성장경로가 불평등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대신할 경로가 보이지 않으면 익숙한 약속을 놓기 어렵다.

위험을 말하며 ‘반대’를 외치는 정치와 풍요를 약속하는 정치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정치 전략에서 풍요라는 건 현실과 동 떨어진 먼 훗날의 장면이 아니라, 정치가 위험에 대해 내놓는 답이다. 모든 정치는 어떤 상태를 위험으로 규정하고, 그 위험이 해결된 사회의 모습을 제시한다. 성장정치와 진보정치의 차이도 여기서 생긴다. 어떤 위험을 중심에 놓는지, 누구의 삶을 기준으로 해법을 만드는지에 따라 어떤 미래를 약속하는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벌어졌던 ‘풍요’ 논쟁에서의 개념과는 다소 다르거나 폭 넓게 보는 것이지만 여기서 개념 정의를 더 심화하는 건 큰 의미는 없을 것 같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진보정치가 위험의 언어를 줄이고 장밋빛 미래만 말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생존 불안에 대한 답을 성장정치에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의 생존을 위해 내일을 파괴하거나, 내일을 지키기 위해 오늘의 존엄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사회를 제시해야 한다.

성장정치가 약속하는 풍요

성장정치는 경제 전체의 규모가 커지면 사회도 풍요로워진다고 본다. 산업의 확대가 일자리를 만들고, 기술발전이 생활의 편의를 높이며, 생산력의 증가가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문제는 총량의 증가를 사회 전체의 풍요와 곧바로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데 있다.

성장의 편익은 고르게 도착하지 않는다. 기업과 주주, 토지와 자산의 소유자에게 집중될 수 있다. 노동자는 더 높은 생산성과 함께 고용불안과 노동강도의 증가를 겪을 수 있다. 지역에는 세수와 일자리보다 토지수용, 전력과 물 부족, 환경오염이 더 크게 남을 수도 있다. 기술의 편익은 널리 확산되지만 기술을 통제하는 권한과 수익은 소수 기업에 집중될 수 있다.

성장주의의 풍요는 위험을 동반한다. 하나의 산업과 개발사업이 특정한 풍요를 만들면서 새로운 위험도 함께 만든다. 반도체 클러스터와 데이터센터는 투자와 일자리를 약속하지만, 막대한 전력과 용수 수요를 만든다. 도시개발은 주택 공급과 자산가치 상승을 내세우지만, 세입자의 퇴거와 주거비 상승을 불러올 수 있다. 플랫폼 산업은 편리함과 새로운 소득 기회를 제공하면서 노동의 위험과 비용을 개인에게 넘긴다.

진보정치는 성장정치의 약속이 위험하다는 점을 오랫동안 비판해왔다. 성장은 저절로 분배되지 않으며, 개발의 이익과 위험은 불평등하게 분배된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유효한 비판이다. 그러나 비판만으로 사람들을 성장정치에서 떼어낼 수는 없다. 큰 위험을 수반하는 작은 이익이라도 있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진보정치가 비판하는 사업과 개발을 축소했을 때 일자리와 소득, 지역경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보여줘야 한다. 기존의 풍요가 불공정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과 다른 풍요의 가능성을 믿게 만드는 것은 별개의 과제다.

진보정치의 답은 풍요를 포기하자는 것이 될 수 없다. 풍요의 내용과 수혜자, 생산 방식과 결정권을 다시 정해야 한다.

진보적 풍요

진보적 풍요는 성장정치가 사용하던 말에 진보적이란 태그만 붙이는 구호는 아니다. 사회가 무엇을 충분히 가져야 하는지, 누구의 필요를 우선할지, 생산과 분배와 결정의 질서를 어떻게 바꿀지 묻는 큰 숙제다.

풍요는 총량보다 구성의 문제다

재화와 생산이 계속 늘어나는 사회를 풍요롭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은 늘어나야 하고, 어떤 것은 줄어야 한다. 또 어떤 것은 총량은 그대로 두되 시장에서 구매하는 상품으로 남겨두지 않고 공적 영역으로 전환해야 할 것도 있다.

가령 안정적인 주거와 소득은 더 충분해야 한다. 의료와 교육, 돌봄과 교통, 에너지 같은 공공서비스도 넉넉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휴식과 자유시간, 관계를 유지할 여유, 문화와 학습과 창작에 접근할 기회가 필요하다. 살던 지역을 떠나지 않고도 일하고 배우고 치료받을 수 있는 생활 기반도 풍요에 포함된다.

반대로 과도한 노동시간과 생존경쟁은 줄어야 한다. 필수재를 구하기 위해 시장에서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상태도 줄어야 한다. 기업이 토지와 에너지, 데이터와 기술을 독점하는 힘도 제한되어야 한다. 수명을 의도적으로 줄인 상품, 과도한 광고와 투기적 개발, 위험을 약자와 지역, 미래세대와 다른 국가에 전가하는 생산도 축소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제 전체가 성장하는지 축소하는지를 하나의 숫자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진보적 풍요는 부문별 확대와 축소, 전환의 방향을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작업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려운 문제고, 잘 다뤄지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물질적 풍요는 비물질적 풍요로 이어져야 한다

물질적 풍요와 비물질적 풍요를 구분하되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 주거와 교통, 의료와 돌봄, 에너지와 소득은 삶의 물질적 기반이다. 이 기반이 충분하고 안정적으로 제공되어야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통제하고 삶의 선택지를 넓힐 수 있다.

공공주택이 충분하다는 것은 집이라는 물건이 많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주거비와 퇴거 위험이 줄면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원하지 않는 일을 무조건 견뎌야 할 압박도 줄어든다. 직장을 옮기거나 노동시간을 줄이고, 돌봄과 관계, 학습과 정치 활동에 시간을 쓸 가능성도 커진다.

대중교통도 마찬가지다. 요금이 낮고 배차간격이 짧으며 노선이 잘 갖춰진 교통망은 이동권을 보장하면서 통근시간과 자동차 소유의 부담을 줄인다. 지역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선택지도 넓힌다. 돌봄 인프라의 확대는 가족에게 맡겨진 무급노동을 줄인다. 의료와 에너지가 보편적으로 제공되면 질병이나 극한 기후가 삶 전체를 무너뜨릴 위험도 줄어든다.

반대 방향의 연결도 중요하다. 사람에게 시간과 결정권이 있어야 필요한 물질적 기반을 제대로 만들고 운영할 수 있다. 노동자와 주민이 참여할 여유와 권한을 가져야 어떤 주택과 교통, 에너지 시설이 필요한지 민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참여가 빠진 공공투자는 이용하기 어려운 시설이나 지역에 부담을 떠넘기는 사업을 만들 수 있다.

진보적 풍요의 물질적 기반은 시간과 선택권, 관계와 참여의 기회로 전환된다. 물질적 풍요는 시간과 자율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확대된 시간과 자율성은 다시 물질적 풍요의 생산과 운영을 민주화하는 힘이 된다. 물질적 기반이 없어 불안정한 주거와 장시간 노동, 돌봄 부담에 짓눌린 사람에게 자율성과 공동체의 가치만 계속 말한다면 위선이다.

물론 물질적 재화가 늘어난다고 삶이 저절로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생산성이 높아졌는데 노동시간은 줄지 않을 수 있다. 소득이 늘어도 주거비와 교육비, 의료비가 더 빠르게 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진보정치가 물질적 필요를 가볍게 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을 충분히 만들고 무엇을 줄일지, 그 선택을 누구의 필요와 어떤 생태적 기준에 따라 내릴지 제시해야 한다. 생산 자체를 금기시하거나 개인의 선한 의지, 안분지족으로 사회적 결핍을 덮는 태도는 적어도 정치 영역에선 결별해야 한다.

필요한 풍요는 생산되어야 한다

진보정치는 노동과 환경을 희생하면서 생산량을 늘리는 방식, 대기업과 특정 산업에 자원을 집중하는 방식, 무엇을 생산할지를 기업의 수익성에 맡기는 성장정치의 방식을 비판해왔다.

그러나 성장정치의 생산 방식을 비판하는 것과 생산을 포기하는 것은 다르다. 오히려 적극적인 생산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주택과 병원, 버스와 철도, 에너지 설비와 돌봄 인프라는 실제로 만들고 운영해야 한다. 낡은 주택과 시설은 수리해야 한다. 이를 담당할 노동자와 기술, 조직도 필요하다.

성장정치는 반도체 클러스터와 데이터센터, 신도시와 고속도로 같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제시한다. 진보정치도 물질적 규모를 가진 약속이 필요할 수 있다. 다만 또 하나의 초거대 산업단지를 내놓을 필요는 없다. 공공주택을 건설하고 매입하고 개보수하는 전국적 사업, 어느 지역에서든 일정한 배차간격을 보장하는 대중교통망, 노후주택과 공공건물의 대규모 에너지 효율 개선, 생활권마다 배치되는 돌봄·의료·교육 기반, 지역별 재생에너지와 공공 전력망, 농촌과 중소도시의 빈집과 공공시설 재생도 거대한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

한곳에 수십조 원을 투입하지 않더라도 전국의 수많은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된다면 그 규모와 고용 효과, 산업적 영향은 작지 않다. 성장정치가 몇 개의 산업거점을 약속한다면 진보정치는 생활에 필요한 기반을 전국 곳곳에 촘촘하게 생산하는 계획을 내놓을 수 있다.

이런 계획이 가능하겠냐는 질문도 남는다. 수익성이 낮은 서비스를 어떻게 지속할지, 필요한 재정과 기술, 인력과 생산조직을 어떻게 마련할지 답해야 한다. 그래서 그 수요를 시장에만 맡길 수는 없다. 사회가 필요한 것을 정하고 공공재정과 조달, 장기계약으로 안정적인 수요를 만들어야 한다.

다만 분산된 생활기반 투자만이 유일한 답은 아니라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오히려 진보정치에서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한 부분이다. 고착화된 수도권 집중의 물길을 바꾸거나 에너지·교통 체계를 전환하려면 규모가 큰 사업이 필요할 수 있다. 반도체와 AI 같은 산업의 성패가 고용과 연금, 자산시장과 국제수지에 미칠 영향도 가볍게 볼 수 없다. 따라서 산업의 규모나 종류만으로 찬반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는지, 생태적 한계 안에서 가능한지, 소유와 성과를 누가 가져가는지, 지역 간 불균형을 줄이는지, 다른 국가에 비용을 전가하지 않는지를 함께 판단해야 한다.

진보정치는 무엇을 분배할 것인가와 함께 무엇을 얼마나, 누구에 의해 생산할 것인지 말해야 한다. 여기서 생산은 제조업과 건설업만을 뜻하지 않는다. 돌봄과 의료, 교육과 운송, 유지보수와 수선, 자연과 생활환경의 복원도 사회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이다. 풍요로운 사회는 무언가를 계속 새로 짓는 사회만은 아니다.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사회다. 이미 존재하는 주택과 시설, 사람과 생태계를 잘 돌보고 오래 유지하는 사회도 풍요로울 수 있다는 그림을 계속 그려야 한다.

누구의 풍요인가

‘누구의 풍요인가’는 잉여를 누구에게 나눌지 묻는 사후적 질문이 아니다. 누구의 필요냐에 따라 처음부터 생산과 투자의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즉, 가장 결정적이고 우선적으로 다뤄져야 할 질문이다.

누구의 생활문제를 공적 필요로 인정할 것인가. 누가 소유하고 운영할 것인가. 생산 과정에서 생긴 잉여를 주주에게 배당할 것인가, 다시 사회에 투자할 것인가. 노동자와 주민은 그 결정에 얼마나 참여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복지라는 개별 정책 부문을 넘어선다. 성장한 뒤 일부를 세금으로 거두어 재분배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생산의 목적과 투자 우선순위, 기술의 방향과 소유구조를 바꿔야 한다. 공적 자원이 기업의 수익을 늘리는 데 사용됐다면 사회도 그 성과에 대한 권리와 통제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모두의 풍요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을 같은 양(量)으로 나누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교통과 의료가 부족한 지역에는 더 많은 공공투자가 필요하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더 두꺼운 지원이 필요하다. 주거비 부담이 큰 세입자와 자산이 없는 사람에게는 주거정책의 우선순위가 달라야 한다. 보편성은 모두에게 같은 양을 나누는 원칙이 아니다. 누구나 필요할 때 충분한 주거와 돌봄, 의료와 이동을 누릴 수 있도록 하려면, 더 큰 결핍을 겪는 사람과 지역에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해야 한다. 

풍요는 사회의 역량이다 

풍요는 완성된 사회의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가 공적 필요를 파악하고, 자원을 배분하며, 생산을 조직하고, 위험을 통제하고, 갈등을 민주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능력도 풍요의 일부다. 이쯤 되면 좋은 사회의 조건을 모두 풍요라는 말에 넣는 ‘만물풍요론’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회의 역량을 포함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필요한 것을 일시적으로 공급하는 것과 그것을 계속 생산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사회는 다르기 때문이다.

공공주택의 숫자만큼이나 공공이 주택을 계획하고 공급하고 관리할 역량이 중요하다. 돌봄서비스의 예산만큼 돌봄노동자가 현장을 운영하고 개선하는 데 참여할 구조가 중요하다. 재생에너지 설비의 규모만큼 지역주민이 에너지 생산과 이익 배분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관리 역량도 생산처럼 고용과 경제적인 성과를 유발한다.

공공금융과 데이터 공개, 노동자의 경영참여 경험, 지역의 생산과 유통 기반, 협동조합과 자치조직 네트워크는 그래서 미래 사회의 재료다. 이런 제도들이 이미 시장과 국가의 기존 질서에 종속됐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지역의 작은 실험이 경제 전체를 바꾸기에는 미약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평가절하하고 폐기하기보다, 포섭의 위험을 통제하고 서로 연결해 더 큰 변화를 감당할 역량으로 축적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진보적 풍요란 무엇이 충분해야 하는지를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삶에 필요한 물질적 기반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며, 그것이 시간과 자율성, 관계와 참여의 확대로 이어지도록 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누구도 풍요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생산과 분배, 소유와 결정의 질서를 바꾸고, 이를 지속할 집단적 능력을 현재부터 축적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미래는 투쟁을 연결한다

반대하는 정치와 대안을 내놓는 정치는 흔히 다른 것처럼 평가받는다. 지금까지는 나쁜 정책과 사업에 반대했고, 이제부터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저항과 대안은 시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현실의 투쟁은 이미 무엇을 지키고, 누가 결정하고, 어떤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지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인 계획과 미래상으로 모이지 않았을 뿐이다.

대안정치는 청사진을 그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다. 현재의 투쟁 안에 있는 사회적 원리를 드러내고, 다른 투쟁의 원리와 연결하며, 제도와 권력의 변화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연대의 의미도 달라진다. 연대는 공통의 이해관계와 피해, 공동의 적을 중심으로 조직되어왔다. 여전히 중요한 방식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세입자, 농민과 돌봄 제공자, 지역주민과 기후운동가, 성소수자, 장애인의 이해관계가 언제나 선명하게 결합되지는 않다. 때로는 노동과 생태, 소비자와 생산자, 지역개발과 환경보전 사이에 갈등도 생긴다.

다양한 갈등을 연결해야한다고들 하지만 기계적으로 하나의 이해관계로 환원하면 중요한 차이가 지워진다. 특정 집단의 요구가 사회 전체의 보편적 요구로 간주될 위험도 있고 어떤 요구는 다른 요구와 충돌하기도 한다. 그럴 때, 미래가 연대의 다른 연결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바로 지금 같은 처지에 놓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 미래가 이 모든 투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

노동, 돌봄, 주거, 지역, 기후,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해관계로 묶기 쉽지 않지만 진보적 풍요를 구성하는 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때 연대는 피해를 입은 집단들이 서로 돕는 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다른 사회를 함께 건설하는 관계가 된다.

물론 공동의 미래를 말한다고 갈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산업전환 과정에서 일자리와 생태가 충돌할 수 있다. 공공주택 공급과 지역의 환경이 충돌할 수 있다. 동물의 권리와 특정 산업 노동자의 생계가 충돌할 수도 있다. 풍요가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만능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지금 당장의 긴장으로 연대하지 못하거나 어색한 기계적 연대에 머무는 것보다는 함께 만들 사회를 잠정적으로 합의하고 그 길 위에서 서로의 요구를 배치해보는 경험은 그 자체로 중요한 미래의 재료가 된다.

진보정당의 역할

모든 정치조직, 운동조직이 사회 전체의 미래상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이나 운동도 있고 특정 이슈나 방법론에 집중하는 운동도 있다. 대안보다는 직면한 위험을 가시화하는 데 특화된 운동도 있다.

그러나 종합적인 사회상을 그리려는 진보정당은 분명히 다른 역할을 맡아야 한다. 서로 다른 요구를 정치적 기획으로 연결하고, 충돌을 조정하며, 제도 변화의 순서를 설계해야 한다. 이 작업은 여러 요구에서 공통분모만 추출하는 일이 아니라 정당이 자기 브랜드를 내걸고 내세울 만한 미래에 대한 약속, 미래상을 그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미래로 가는 과정 속에 노동과 생태, 지역과 보편성, 생산자와 이용자의 요구를 배치하고 조정하는 일이다. 정당이 그런 작업을 할 때 정당 외부에서 비판적인 의견을 보태는 건 언제나 바람직하다. 하지만 원외정당이 뭐하러 그런 작업을 하냐며, ‘너뭐돼’식으로 반응한다면 그 상대방은 같이 미래를 도모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다양한 운동이 피해를 입은 사람을 조직하고, 위험을 가시화하고, 부정의를 공론장으로 끌어낸다. 정당도 함께하지만 이 역할을 온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다양한 운동의 요구를 선거공약으로 흡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보정당의 고유한 역할은 서로 다른 투쟁이 미래에 어떻게 만나는지 설명하는 데 있다. 현재의 투쟁과 개선이 다음 변화를 가능하게 하도록 정책의 순서도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거와 제도권 내 정치를 진보적인 미래로 가는 계기로 사용해야 한다. 이 부분이 정당의 전략이 사회운동과 100% 동일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당은 공약을 모으는 조직을 넘어 사회의 설계자이자 현실 정치에 구현할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표현이 마치 정당을 우위에 두는 것처럼 읽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역할이 없다면 진보정당은 왜 필요할까.

공공주택 확대, 돌봄서비스 확충, 공공 재생에너지, 노동시간 단축, 공공금융, 협동조합 경제, 노동자 기업 등 진보정치에는 좋은 정책이 많다. 하지만 각각의 정책이 병렬적인 목록으로 제시되면 사회를 바꾸는 힘은 제한된다. 정책 사이의 관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공공주택을 누가 생산하고 관리할지, 돌봄서비스 확대가 어떤 노동조건과 소유형태를 만들지, 에너지전환 투자가 기존 대기업의 새로운 수익원이 될지 지역과 시민의 권한을 넓힐지 알기 어렵다. 각각의 영역에선 이미 이런 고민들을 다 하고 있지만 그게 하나의 사회 구조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정책이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연쇄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사회가 필요한 것을 민주적으로 정하고, 재정과 공공조달을 통해 안정적인 수요를 만든다. 공공금융은 그 수요를 수행할 생산주체를 육성한다. 공기업과 협동조합, 노동자기업, 지역기업이 생산과 서비스 공급에 참여한다. 노동자와 시민은 운영과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생산 과정에서 생긴 기술과 잉여는 다시 사회에 축적된다. 뻔한 서술 같지만 이런 작고 뻔한 서술에서 연쇄 단계를 그려보면 어떨까. 가치 기반 조달, 공공금융, 협동조합 등은 각각 완성된 대안이 아니지만 서로 연결될 때 다른 경제를 운영할 능력을 형성할 수 있다.

진보정당이 구상한 미래상 위에서 개별 정책의 목적은 현재의 성장정치 옆에 작은 대안을 하나 두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정책이 그 다음 단계에서 더 많은 정책을 불러오는 연쇄를 만드는 것에서 진짜 의미가 생긴다. 목적지는 계속 말하지만 진보정치가 약속할 미래의 풍요다.

한편, 미래 사회는 전문가들이 만든 설계도를 좋은 지도자가 집행하는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당도 미래의 단독 저자가 될 수 없다. 미래의 재료는 반지하와 옥탑방, 노동현장과 지역사회, 사회운동과 공공서비스, 협동과 자치의 경험 속에 흩어져 있다. 정당은 그 재료를 연결하고, 충돌을 드러내고, 제도적 경로를 구성한다. 집권과 국가 운영을 목표로 하는 정치조직이 감당해야할 일이다. 힘 빠진 진보정당이 다시 이 역할을 자신감 있게 자임했으면 좋겠고, 운동 사회에서도 그런 정당의 역할을 기대해보면 좋겠다.

남겨둘 질문들

진보정치에서 ‘풍요’를 둘러싼 논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말하려는 진보적인 풍요라는 건 하나의 정형화된 개념은 아니다. 개념어를 허술하게 쓰는 내 게으름을 단어에 매몰되지 말자는 말로 변명해본다. 아무튼, 이 고민에서 계속 등장하는 풍요라는 건 성장정치가 배포하는 ‘너 굶어 죽는다’는 위험에 대한 진보적 답을 만들자는 선언에 가깝다. 모든 정치가 위험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선언을 실제 정책과 전략으로 옮기려면 여러 갈등을 다뤄야 한다.

첫째, 필요한 생산과 줄여야 할 생산을 구분해야 한다.

어느 부문을 얼마나 늘리고 줄일지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산업과 지역, 노동자의 생계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판정의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을 만들기 위한 민주적인 구조가 필요하다. 성장과 탈성장을 이분법적으로 놓는 기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다른 과제에 비해서는 비교적 합의하기 쉬워 보이지만 다음 질문이 붙으면 삼체 문제가 된다. ‘사회적·생태적 기준으로 결정한 생산을 현실의 재정·기술·자원 조건 안에서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 현재의 조건이 이를 가로막는다면 어느 조건부터 바꿀 것인가.’ 공공 재정과 조달은 규모가 크지만 그것만으로 경제가 무한정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공공 재정의 상당 부분은 기업 이윤에 매달려 있다. 균형점을 찾을 것인지, 구조를 급선회하는 단절점을 기획할 것인지 모두 열어두고 토론해보면 좋겠다.

둘째, 국가의 역량을 키우되 국가폭력과 관료주의를 통제해야 한다.

국가 역할을 강화하다보면 그에 따른 우려도 커진다. 시민사회, 제3섹터가 주도할 수 있다는 의견도 뒤따른다. 나도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아니라 ‘사회’가 주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로드맵 상에서 국가 역할 강화는 필연적이란 생각도 동시에 하고 있다.

국가 중심성을 계속 강화시켜 온 한국의 경로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시민사회나 기업이 아니라 국가라고 생각하는 개인적인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국가의 선함이나 공적 의지를 믿는단 의미가 아니라 트럼프 등의 사례를 보면서 국가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인지’가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래서 국가의 목표를 누가 정할지, 노동자와 시민은 집행과 평가에 어떻게 참여할지, 정보와 기술을 얼마나 공개할지 등 이른바 <민주적 의사결정> 이라는 주제가 진보적인 풍요를 설계할 때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 이때,  강한 국가는 그 뒤 연쇄적으로 이어질 진보적 풍요, 강한 ‘사회’의 등장을 가져올 경로이지 그 자체로 목적지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도 중요하다.

셋째, 기업의 기술과 생산역량을 활용하면서 기업에 포획되지 않아야 한다.

산업전환은 현재 민간기업이 가진 기술과 설비, 인력을 활용하지 않고 진행하기 어렵다. 공공이 위험과 비용을 부담하고 기업이 수익과 기술 통제권을 가져가는 방식이 반복되어온 결과다.

하지만 공적 지원에는 조건이 따라야 한다. 노동과 환경,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을 부과해야 한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지원을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어떤 국가적 프로젝트가 가져올 경제적 이익의 총량을 ‘목표’로 설정하고 그걸 위한 자원 배치를 하는 게 아니라, ‘수도권 집중 해소’, ‘생태적 한계와 지속가능성’ 같이 달성해야 할 사회적 가치를 목표로 두고 그걸 위한 자원 배치/관리를 해야한단 의미다.

이 질문도 역시 어렵다. ‘기업이 사회적 목표 수행의 핵심 주체로 남아 있는 한, 공적 목적이 기업의 축적 전략에 흡수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기업이 사회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어렵지만 중요한 과제다. 요즘 논의되는 초과이윤 관리, 협동조합 운동, 핵심 부문의 공영화/국영화에 대한 논의가 그런 측면에서 중요해 보인다.

넷째, 한국의 풍요가 다른 곳의 위험을 담보로 하지 않아야 한다.

국내에서 진보적인 생산 환경을 갖췄다 해도 그 기반이 다른 국가의 자원수탈과 저임금 노동 위에 놓일 수 있다. 이주노동자의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지위에 기대어 사회적 가치 달성을 위한 비용을 마련할 수도 있다. 선진국에서 생태적, 공동체적 반대에 부딪힌 데이터센터는 남반구 국가의 전력과 물, 토지 자원을 빨아들이러 갈 수도 있다.

진보적 풍요는 국내의 재분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공급망의 노동·환경 기준, 자원채굴 지역의 위험과 권리, 이주노동자의 동등한 권리, 기술과 지식의 공유를 함께 다뤄야 한다. 미·중 패권경쟁에 편승한 산업전략이 만드는 비용도 살펴야 한다.

진보적인 경제 전략을 세우는 데 가장 어려운 부문이 아닐까 한다. 이 고민에서 가장 덜 검토된 영역이며, 진보적 풍요를 국내적 비전으로 축소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답변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다섯째, 복잡한 미래를 대중의 언어로 바꿔야 한다.

생산과 투자, 소유와 결정권을 재구성하는 문제는 복잡하다. 성장주의의 미래는 이미 우리가 몸으로 배워 알고 있지만 진보적 풍요라는 건 어떤 것인지 바로 와닿지 않는다. 가뜩이나 어려운데, 제도와 이론의 언어로 설명하면 정치적 힘을 얻기는 더욱 어렵다.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삶의 모습으로 번역해야 한다. 나도 당연한 소리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또 해보자.

집 때문에 원하지 않는 일을 무조건 견디지 않아도 되는 삶. 돌봄 때문에 가족 한 사람의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 삶. 기술이 발전할수록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사회. 기후를 지키는 일이 생계의 불안을 뜻하지 않는 전환. 이것도 다 추상적이고 복잡하다면, ‘공짜로 버스타는 사회’, ‘버스 배차 15분 이내 유지’ 같은 이야기도 아주 좋은 언어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약속은 당위적인 언어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욕망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정치가 약속하는 미래가 절제와 축소만 있는 게 아니라 풍요로워야할 건 풍요로운 사회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풍요라는 말을 쓰는 게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든다면, 생존을 보장해주는 사회 정도로 해도 된다. 무슨 표현을 쓰든 그 약속이 어떤 일상을 만드는지, 그 미래로 가기 위해 생산과 제도, 권력의 변화가 필요한지 숨기지 말아야 한다.

마스터플랜은 없지만

진보정치가 미래를 말한다고 해서 완성된 유토피아의 설계도를 내놓을 수는 없다. 앞으로 생길 갈등과 기술의 변화, 사회적 조건을 모두 예측할 수도 없다. 모든 제도와 순서를 지금 확정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미래를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공동의 미래가 없으면 개별 정책은 연결되지 않는다. 투쟁은 각자의 피해를 해결하는 데 머물기 쉽다. 정당은 선거를 수행하는 조직으로 축소된다.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없더라도 추상적인 방향은 논의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을 충분히 생산하고, 그 성과와 결정권을 민주적으로 나누며, 비용을 다른 곳에 떠넘기지 않는 사회라는 방향은 지금도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방향으로 가는 길은 직선도 아니고, 한 순간의 혁명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물론 어느 시점에는 소유권과 자원배분의 구조를 크게 바꾸는 단발적 돌파도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현실의 제도를 활용하고 작은 변화를 쌓는 시도와 실험들을 무조건 체제친화적이라고 치부하는 일은 그만둬야 한다. 작은 개혁의 시도가 진보적인 미래상으로 가는 연쇄적 흐름에 도움이 된다면 옹호하고 활용해야 한다. 반대로, 미래로 가는 연쇄를 저해한다면 운동 영역에서 관행적으로 해오던 구호라 하더라도 과감하게 결별해야 한다. 정책이나 투쟁뿐 아니라 경계선에 위치한 여러 대안이론들도 마찬가지다.

이 글은 거창한 사회 비전을 그리기 위해 쓴 글은 아니다. 정책공약 편집 실무를 맡아왔던 (전직)진보정당 활동가가 마음에 있는 고민을 두서없이 풀어놓은 글이라는 게 가장 정확하겠다. 그래서 몇몇 허술한 개념 사용도 있을 것고, 특히 풍요라는 키워드의 위험성에 대해선 나 역시 인지하고 있다. 다만, 풍요란 말을 쓰든 다른 단어를 쓰든 출발점은 분명하다. 우리에게는 위험을 더 정확하게 묘사할 언어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 위험을 넘어 어떤 삶을 함께 만들 것인지 말할 언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야 그 언어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더 넓은 동맹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소하
소하

정당, 도시정치, 도시정책에 관심을 두고 이런 저런 작업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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